황제와 공정

이번 달은 무슨 카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하며 카드를 셔플해봅니다.

어떤 카드가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 카드로 글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쉽사리 카드 한 장을 뽑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뽑은 이달의 카드는 바로

 

유니버셜 웨이트 메이저 카드 4번 황제입니다.

 

지난 번에 올렸던 글, ‘이대남과 달님’에서도 잠깐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재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키워드가 공정입니다.

 

공정이 화두가 됐던 이슈, 사건들 중 제가 떠오르는 것들을 하나씩 꺼내봅니다.

2020년 인천국제공항, 2021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비정규직 직원 정직원 전환에 대한 기존 정직원들의 반발,

김연경 선수가 KBS 다큐 인사이트에서 제기했던 한국 여자배구/남자배구의 샐러리캡 (팀 전체 연봉상한선) 차이에 대한 문제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것이 능력주의입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기준으로 이야기하게 됩니다.

노동의 종류가 귀천을 정하지 않으며동일한 시간동안 노동을 했다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고노동의 숙련도가 올라갈 수록, 혹은 더욱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거나많은 사람들을 관리하게 되는 등같은 직군 안에서도 보다 다양한 노동을 감당할 수록 월급이 더 많아야 한다.

는 것이죠.

 

하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출발선 자체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 회사에 들어가기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공부를 하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시험을 쳐서 합격한 뒤 정직원이 됐다.우리는 시험을 통해 우리의 능력을 증명했다.하지만 시험을 보지 않고 회사에 들어와 일하는 사람들은우리보다 쉽게 회사에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우리와 같은 월급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같은 회사에서 같은 시간동안 일을 한다고 해서같은 가치의 일을 한다고 볼 수 없다.

는 것입니다.

 

 

8월 12일 방영된 KBS의 다큐멘터리 다큐 인사이트 – 다큐멘터리 국가대표 편에서 김연경 선수가 제기한 여자-남자배구의 샐러리캡에 대한 문제도 비슷한 양상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여자배구의 샐러리 캡은 팀당 23억인데 반해 남자배구의 샐러리 캡은 31억으로 여자배구의 샐러리 캡이 8억이 적습니다. 한 팀당 받을 수 있는 연봉 상한선이 적어질 수록 선수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임금 또한 적어질 수밖에 없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죠.

 

김연경 선수가 제기한 샐러리 캡 문제에 대해

여자배구와 남자배구의 샐러리 캡이 최소한 동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배구라는 스포츠 안에서 프로선수로서 제공하는 경기력과 팬 서비스의 가치가남자배구의 그것보다 낮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양측의 샐러리 캡이 동일해야 한다.

 

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남자 배구선수랑 여자 배구선수랑 시합해서 이기면 샐러리 캡 높이면 되겠네’

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자배구가 샐러리 캡이 낮은 이유는 여자 배구선수가 남자 배구선수보다신체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며그렇기 때문에 여자배구남자배구 간 샐러리 캡의 차이는 합당하다.

 

는 것입니다.

컨텐츠의 가학성 및 전체주의 등 많은 논란이 있었던 가짜 사나이의 한 장면입니다. 사람들은 이 대사에 열광했습니다. 물론 이 말이 유행하게 된 계기는 무서워 보이는 이근 대위의 이미지와 상반된 한국어로 말할 때 어눌해지는 말투 탓도 있었겠지만 ‘개인주의는 안 되지’ 라는 메시지에 동의하는 사회의 분위기 또한 존재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개인주의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로 많이 생각을 하는데 이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거의 같은 단어로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정의된 두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주의 : 사회나 국가 따위의 집단보다 개인이 존재에 있어서도 먼저이고, 가치에 있어서도 상위라고 생각하는 사상

이기주의 :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고, 사회 일반의 이익은 염두에 두지 않으려는 태도

(표준국어대사전)

 

요즘 사람들은 이기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개인주의는 찬성하는 것을 넘어 숭상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이 잘 하면 되는 것이고 개인이 좋은 결과를 얻었다면 그건 개인이 잘 해서이지 그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죠.

하지만 어떤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그것이 온전히 그 사람만의 힘으로 뭔가가 잘 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이쯤에서 능력주의의 정의를 보겠습니다.

 

능력주의 : 학력이나 학벌, 연고 따위와 관계없이 본인의 능력만을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태도.

 

앞서서 공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에 대한 의견들을 보여드렸는데요. 하지만 이 논의에서 의외로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공기업의 정직원이 되기 위해 보는 시험 자체를 준비하지 못하는 이가 있습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취업할 수 있는 나이를 넘어버린 경우도 있고 n년 동안 걸릴 시험 준비를 위해 생업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내야 할 생활비를 책임지지 못해 시험 준비에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 돌봐야 할 가족이 있어 시험에 전념할 수 없는 사람 등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시험 준비과정 자체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공기업에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는 건 어쩌면 n년 동안 생활비와 생활환경을 지원해줄 환경(집안의 도움이 되었건 가족이 아닌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건)이 있었다는 이야기죠. 앞서 말했던 다양한 경우에 해당한 사람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해서 기업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일까요? 그러지 못했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시작점에서부터 이미 자격을 박탈당한 사람들인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공기업에 합격한 사람들은 능력주의에 입각해서 본인의 능력만으로 시험에 합격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배구선수는 또 어떻습니까? 여자 배구선수들이 노력이 부족하고 절실함이 부족하고 경기력이 월등히 모자라서 샐러리 캡이 차이가 나게 된 건가요? 그걸 정하는 협회의 결정이 있었고 김연경 선수 같은 몇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스타플레이어를 제외하면, 아니 사실 김연경 선수까지도 한국배구연맹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선수는 없습니다. ‘샐러리 캡을 올려달라’고 목소리를 냈다가 바로 선수생활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건 과한 생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여자 배구선수들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샐러리 캡 차이를 받아들여야 한다고만 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주장일까요?

 

인간 사회가 여기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배려하고 장치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일 겁니다. 전쟁이 나면 노인과 어린아이, 여성은 공격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지점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는 분명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부분에 대해 약자일 수밖에 없고 그런 약자성을 서로의 합의를 통해 보호받고 보호하며 이 사회라는 것이 유지됐던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4번 황제 카드를 봅니다.

황제카드의 왼손에 있는 물건은 ‘보주’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체 위에 십자가를 얹은 형태를 하고 있고 이는 ‘신성이 부여한 세상의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위에 있는 보주를 손에 쥐고 있다는 건 신성으로부터 인정받은 지배자라는 뜻이 되죠.

 

하지만 카드 속 황제가 들고 있는 보주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신성이 부여하지 않은 통치권, 즉 황제 스스로가 힘을 휘둘러 얻은 통치권이며 정당성/명분이 없는 통치권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누군가가 부여해 준, 혹은 인정해 준 통치권이 아니기 때문에 황제는 언제나 자기의 통치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얻은 통치권은 막강할 수 있지만 그만큼 황제는 늘 이 통치권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하고 주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자리는 늘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카드 안에서 황제가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 바로 늘 주위를 경계해야 하고 언제든 방어와 공격을 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의 상징입니다. 또한 카드 뒤에 보이는 돌산은 이런 황제의 고독함을 상징합니다. 딱딱한 돌의자에 앉아있다는 것 또한 황제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한 세계를 본인의 힘으로 지키고 가져야 한다는 설정 때문에라도 황제 카드는 스스로 무언가를 지키거나 이루는 것에 능한 카드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이룰 때 단순히 타인의 인정을 받는 수준이 아니라 타인 위에 군림하는 힘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황제에게 의사소통, 배려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더 잘났고, 내가 더 힘이 세다면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원리이죠.

황제카드의 특성은 결국 힘이 강해질 수록 본인의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의 인생의 방향 또한 본인 개인에게 쏠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on a plate 라는 만화의 한 장면

 

위 만화는 외국에서 나온 on a plate라는 만화의 한 장면입니다. 한때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단어가 사회를 휩쓸었을 때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위에 나온 리처드와 폴라의 공정이 과연 같은 단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공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공정이 각자의 시선에서 생각하는 공정임을 생각한다면 누군가에게는 저 사람이 말하는 공정이 자기가 생각하는 공정과는 너무나도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충분히 하지 않을까요?

 

자기가 한 노력에 비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준 삼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은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도 갖게 해달라고 하면 난리를 피웁니다. ‘니들이 노력해서 가져야지 어디서 큰 소리냐’ 라고 호통을 치죠. 본인이 가진 힘은 황제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본인의 엄청난 힘으로 뭔가를 이뤄냈다고 착각하고 그 이뤄놓은 것이 황제의 나라에 비할 바가 전혀 못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뤄낸 것이 대단한 것이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머리 속은 개인주의를 가장한 이기주의로 가득하겠죠.

 

하지만 우리가 못 나서 이렇게 된 게 아니고 그대 또한 본인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그리고 그렇게 꽉 쥐고 있는 알량한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굉장히 외롭게, 그리고 늘 불안하게 살아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꼭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능력주의, 진짜 능력주의가 맞나요?

당신이 말하는 그 개인주의, 진짜 개인주의가 맞나요?

 

 

Written by 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