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결 이어가기: 전염병, 연대, 삶

백신을 맞은 날은 지난 6월 11일이었습니다. 확진자가 천명이 지금보다는 훨씬 아랫단위의 숫자가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아마도 방역수칙 2단계를 준수하라고 하던 어느 날이었으며, 아침인데도 유례없는 더위와 습기로 병원에 가는 것이 사치인지 모를 때였지요. 필자가 살고 있는 지역 예비군에서 얀센 백신을 신청하라는 안내 문자메시지가 발송되었습니다. 미국이 한국 군인들에게 지원의 목적으로 들여온 까닭에, 얀센 백신은 주로 20대인 군 장병이 대상이 되어야 했지만, 부작용과 접종 후 후속 반응으로 인해 얀센 백신의 영광(?)은 예비군과 민방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백신을 담당하는 병원은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어느 여성병원이었는데, 거기에 모인 대부분 ‘예비군’들은 필자와 같은 예비역 남자들이었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로 사전 예약에 당첨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회사나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백신 접종 후에 얼마나 아픈지 정보를 얻고 있었습니다. 빽빽이 놓인 푹신한 소파를 하나씩 거리 두고 앉아있는 모습은 꽤 이질적이기도 했지요. 간단한 문진표를 작성한 후, 간호사 선생님들의 안내를 따라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기저질환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고혈압과 고지혈증이 있음을 알렸고,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체크를 했습니다. 그리고 특유의 멘트. ‘지금 맞으시는 주사가 어떤 주사지요?’라고 하면서 지금 맞고 있는 주사가 얀센임을 인지시켰습니다. 백신주사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필자는 그 와중에 “혹시 왜 물어보시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했고, 자신이 무엇을 맞고 있는지 알고 있는지 알려야 하므로 물어본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따끔! 팔 위쪽으로 액체가 확실히 들어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죠. 정확히 10시간 후인 오후 11시, 저는 세상에서 가장 추운 초여름을 맞아야 했습니다. 타이레놀 500mg 정을 두 통정도 먹은 것 같습니다(필자는 아픈 것을 무서워합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에는 간호사 선생님께 안내받은 어플 다운이 생각났습니다. 백신 접종을 인증한다는 이미지가 나타났습니다. ‘이제는 벗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절은 6월 말, 드디어 7월이면 분명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는 희망이 꿈틀댔습니다. 하루 확진자가 천 명이 넘는 요즘에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불과 한 달 전, 백신 접종의 아찔한 기억입니다.

이른바 ‘원샷’으로 끝난다는 얀센을 접종하고 나서(사실 접종한 부위의 팔이 아직도 욱신거리네요) 백신에 무력한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마스크 벗기’라는 희망은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백신은 바이러스를 예방하기 이전에 신앙과 같은 그 무엇이었습니다. 7월에 마스크를 벗을 수 있다니, 얼마나 들떳겠습니까? 하지만 2년에 가까운 자기 통제의 시간을 가진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7월 마지막 날에도 천 명대를 훨씬 웃도는 확진자의 숫자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을까요? 우리가 사실상 코로나바이러스를 박멸하기는커녕, 우리의 삶을 바꾸는 중요한 원인이 되어가고 있음을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신앙이 허구로 밝혀지는 순간 믿음의 드라마는 막을 내리기 마련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코로나와 관련된 우리 생활의 변화를 “생활양식 전체의 갑작스러운 종말”이라고 불렀습니다. 사실상 사람들이 코로나 이전에 누리고 있던 생활 자체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는 상실감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부분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일들이 코로나로 인해서 예전과 완전히 생활이 달라졌고,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은 그야말로 ‘욕망’으로만 남게 된 상황을 꼬집은 것이죠. 물론 이 세계는 시간의 차원에 올라 타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코로나 이전 사람의 걸음걸이에 걸리는 시간만큼 나름 천천히 변화했겠지만, 지금은 코로나라는 질주하는 기차 위에 모든 것이 통제되고, 이전의 것들과 결별을 외쳐야 한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너무나 ‘일반적인’ 시각으로만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변하는 것들과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일정 정도 ‘힘 있는 자들’이 권력을 사용하지만, 그들의 의도대로 변하지 않는 상황들이 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마스크와 백신으로 차단당한 인간관계가 그것입니다. 정말 ‘죽을 것 같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선풍기 하나로 버티는 사람들, 에어컨을 틀고 난 전기세가 겨울철 난방비만큼 두려워서 그야말로 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서비스직의 감정노동, 스마트폰과 키오스크 작동이 두려워 물건을 사지 못하는 노인들, 건물 안에서 일하지 못하고 바깥에서 일해야만 하시는 분들, 학교를 나가지 못해 답답한 학생들과 독박 육아를 하고 있는 가사노동자, 이태원에서의 대규모 확진에 대해서 성소수자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일들, 대학을 사이버로 경험하고 있는 ‘뉴 제네레이션’과 흔히 ‘MZ세대’라고 불리고 있는 세대들의 출현을 불편하게 또는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저는 불편함과 신기함이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어느 정도 ‘편견 있는’ 기성세대들의 불편한 시선들이 공존합니다. 여전히 남초 커뮤니티와 언론에서는 올림픽에 출전한 국가 선수의 숏컷과 손모양을 지적하면서 이를 통해 성차별을 또 자행하고, 이러한 성차별을 이용해 ‘당의 이익을 고려한’ 말하기가 ‘정말 대단한’ 정무적 일정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내보여집니다. 국내 최고대학 청소노동자에게 한문을 시험 보게 한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인터넷 괴담 집보다 시시해질 만큼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어느새 세상의 스펙타클함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하지만, 코로나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그 놀라움의 힘이’ 모두 사라집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잘 지켜야 하는 일이 마스크를 코까지 잘 올려 쓰는 것과, 손을 잘 소독하는 것, 그리고 집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이죠. 사실 이런 문제들은 백신 이전에도 꾸준히 요즘 사용하기에도 쑥스러운 용어인 매스미디어 차원에서 잠깐이나마 알려졌던 일들이지만, 이제는 더더욱 인지하기 어렵고 다시 되돌아보기도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상 저도 예비군의 한 사람이며, 조금 있으면 민방위가 될 사람이지만, 설령 ‘백신만 잘 맞아놓고, 웬 난리냐?’ 라고 하신다면 분명 할 말은 없습니다. 국가가 국민 스스로 그들에게 주어진 편의를 포기하여 방역에 동참하기 기대하는 태도가 저에겐 어색하게만 다가옵니다. 국민들이 국가 권력자들이 해야 할 일들에 감사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은 둘째 치더라도, 백신을 통해 저에게 온 메시지, ‘얀센을 맞을 수 있으니 신청해라’라는 맥락은 비단 집단면역력 생성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감염병의 확산과 지금 한국의 경제 상황, 세계 여러 나라들의 아비규환 같은 사태는 같은 선상에서 움직입니다. 더불어 인터넷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세대와 아닌 세대, 성별과 나이로 구분 되어진 행정을 통한 과학적 또는 생물학적 기준을 가진 분류는 또 다른 분류체계를 낳아, 그에 맞는 ‘통치행위’를 기획하게끔 합니다. 백신은 내가 맞는 것인데, 국가에서 백신의 도입과 접종은 ‘정책적’으로 실시되기 때문입니다. 백신의 도입과 접종의 정당성은 제가 맞고 싶은지의 여부보다 더 우위에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의 기저질환에 대해서는 이미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불안감으로 소비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는 식의 이야기로는 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국가는 보이지 않는 적들을 맞서기 위해 맞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아픔은 각자의 몫이고, 전염의 가능성도 각자에게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정책적 맥락에선 말이죠. 게다가 확진이 되면 바로 그 사람의 행선지는 물론이고, 왜 그곳에 움직였는지 다 밝혀집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측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실제로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지구가 멸망할 것 같다는 기분에 사로잡히나 봅니다. 코로나에 감염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저도 같지만, 전염병에 걸리는 일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감염이야말로 통제할 수 없는 일임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그 이전에 몇몇 소수의 사람이 제기해 온 문제들에 대한 담론은 오히려 코로나라는 생물학적 방패로 인해 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감히 생각해봅니다. 코로나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고 말입니다. 감염과 무관하게도, 지금은 코로나를 더는 두려워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또는 주변 공동체에서 행해졌던 일들과 관심에 대해서 코로나 사태에 떠밀려 더 이상 모른 척하기에는 이미 그것들은 기존부터 변하지 않았던 문제입니다. 계층론과 세대론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정부는 해결을 위한 유지와 정책적 흐름만 강조하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천재지변’이기 때문에 사실상 누구의 책임도 아닐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달라진 세계의 모습을 빨리 파악하길 원하지, 우리 사회가 놓쳐왔던 일에서 완전히 외면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있는 삶의 문제들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우리 삶의 문제들, 만약 일상이라는 뜨뜻미지근한 개념이 진짜로 있다면, 그러한 문제들은 마냥 파악하기 어려웠고, 풀기도 어려웠습니다. 마스크 벗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백신이 구원처럼 들리던 메시지들은 변이바이러스의 재림(?)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요. 이러한 문제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이전에 지속하던 사람들의 연결이 코로나 상황이라고 해서 끊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변 상황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끝없는 문제제기들을 통해 비록 제한적일지라도 문제를 발견하고 공론화하는 연결들은 다시금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던 사실들이 오히려 코로나로 인해 은폐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변한 것은 사회가 아니라, 코로나의 해결을 바람과 동시에 기존에 문제 제기 되었던 상황들을 감추게 되었다는 것일 테지요. 이제 우리는 앞서 문제라고 여겨왔던 상황들을 끊임없이 문제 제기하고, 접근하며, 그것들을 둘러싼 연대를 공고히 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러한 연결을 통해 또 다른 연결을 창조해내는 것, 이것이 필요합니다. 전염병이라는 포장지 아래 또 가라앉아버린 이야기들을 건져내어 조심스럽게 다시 펼쳐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하니까요.

 

 

Written by felix under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