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승리』, 숨겨져 있는 거대한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나는 지금 동네 공원에서 이 책, 『씨앗의 승리』를 읽고 있다. 도서관 근처의 야트막한 산에 조성된 공원으로 근린공원이라 불리는 듯하다. 아래에는 차들이 지나다니지만 여기엔 참새의 놀이터가 있고 청설모가 사람을 개의치 않아 하며 잣을 까먹는다. 운이 좋다면 딱따구리도 만날 수 있다. 머리가 빨간, 천연기념물인 딱따구리 말이다.

이곳을 유지시키는 것은 『씨앗의 승리』에서 나오듯 씨앗들의 힘이다. 이 숲속 동물들은 씨앗을 까먹으며 살아간다. 그 씨앗을 만들어내는 아름드리 나무들도 씨앗에서 시작됐다. 인간은 오로지 그 씨앗의 혜택을 맛보며 살아갈 뿐이다.

 

어릴 적, 포도와 수박을 먹을 때 늘 들었던 말이 있다. 포도알이나 수박씨를 통째로 삼키면 뱃속에서 그 씨앗들이 싹을 피워 입 밖으로 덩굴이 자란다는 말이었다. 어른이 아이에게 흔히 하는 짓궂은 농담이었지만 나는 그 말을 진짜로 믿고 공포에 떨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에서 자라나온 덩굴이 맺은 포도와 수박 등을 따먹을 생각에 은밀히 기뻐했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어린 나는 분명 씨앗의 힘을 믿고 있었다. 인간의 몸을 씨앗이, 그리고 식물이 지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물론 위에서 그토록 독한 액체가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씨를 심으면 싹이 자란다, 는 명제를 수학 공식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다시 잊어버리고 살았다.

 

하지만 『씨앗의 승리』를 읽으며 정말 새삼스럽게도 나는, 그리고 인간은 씨앗이 지닌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단 걸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씨앗 없이는 인간은 생을 영위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우리의 기본적인 의식주는 전부 씨앗이 지배하고 있다. 씨를 뿌리면 그 자리에서 식물이 자라난다. 흔하게 보이는 일이지만, 실상 씨앗이 싹을 발아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지를 알게 되면 그냥 일상적으로 지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씨앗 하나에는 엄청난 드라마가 숨겨져 있다.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나가는 것이 저자 소어 핸슨의 힘이다. 나는 이제 우리 동네 근린공원에 감사하게 되었다. 이것을 조성하기로 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의 힘이 더 이상 닿지 않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원을 유지하고 있는 식물과 씨앗의 힘에 감사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웹툰 작가님은 언젠가 자랑스럽게, 자신은 모든 식물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것이 취미라는 내용을 만화로 그린 적이 있다. 딸기를 먹다가도 콕콕 박힌 씨앗을 이쑤시개로 빼내고, 복숭아를 다 먹은 뒤에 씨앗을 줄톱으로 갈아내고, 망고를 선물받으면 그 안에 있는 씨앗 발아에 도전할 생각으로 두근두근한다고. 『씨앗의 승리』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그 웹툰 작가님이 이 책을 보셨으면 어땠을까, 하고. 그리고 조금 아쉬웠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이 책에 대해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씨앗은 언제나 가능성을 상징한다. 모든 씨앗은 거대한 식물로 자라날 가능성을 내포한 채로 생겨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씨앗들 또한 그렇다. 땅콩으로 예를 들어보자. 볶거나 삶지 않은 땅콩을 땅에 심으면 그것이 그대로 자라나 땅콩나물이 된다. 땅콩은 척박한 토양에서도 매우 잘 자라며 지력을 회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 주로 개간지 등에 많이 심어진다고 한다. 월간 땅콩문고와 함께하는 글은 이번 5월호가 마지막이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월간 땅콩문고와 이 글이 땅콩처럼 잘 심겨져 자라나길 빈다.

 

*이 연재물은 파주의 동네서점 땅콩문고와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였습니다. 땅콩문고에서 운영하는 책 정기구독 프로그램 <월간 땅콩문고>로 받은 책을 읽고 리뷰를 썼습니다. 땅콩문고는 2018년 11월 말을 끝으로 2년 반 동안의 영업을 마치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 리뷰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파주에 땅콩문고라는 동네서점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Written by 박복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