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했던 그 반려동물에게, 『어느 개의 죽음』

 

얼마 전, 동네 도서관에서 내가 좋아하는 모 저자의 글쓰기 강연이 있었다. 최근 잘 안 써지는 글에 대한 영감도 받고 갖고 있는 책에 사인도 받을 겸 갔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이야기를 듣고 왔다. 인상 깊은 부분은 전부 메모해왔는데, 그중에 ‘애도일기’가 있다. 애도일기란 롤랑 바르트가 각별한 사이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기록한 책이다. 자신이 이별한 대상에 대해서 쓰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럽지만 후일 돌아보면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 있을 거라고, 그 저자는 말했다. (기억에 의지한 거라 정확한 워딩은 다를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 마리의 강아지를 떠올렸다. 내가 13살일 적부터 함께했지만 지금은 곁에 없는, 요크셔와 슈나우져가 섞인 강아지, 깜돌이.

 

마침 이번에 읽을 책도 『어느 개의 죽음』이라니. 이 책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그르니에가 자신이 길에서 데려와 기르던 개 ‘타이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느낀 것을 짧게 정리한 것이다. 언젠가 깜돌이에 대해 글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당연히 이 글을 쓰고자 마음먹는 일부터 매우 고통스러웠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원고의 마감이 늦어진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저널위원회 구성원분들,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깜돌이에 대해서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깜돌이가 나와 가족들 곁을 떠나버린 당시 상황은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남은 것은 죄책감. 혹여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죽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들이다. (우리는 깜돌이가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가장 깜돌이와 애증관계로 이어져 있었던 엄마는 지금도 ‘TV 동물농장’을 보지 못한다.

 

동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 무엇도 동물을 기르도록 강요하지는 않지만, 동물이 불행을 호소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견디기 힘든 압박으로 작용한다.1)

 

녀석이 사랑스러웠던가? 충직했던가? 한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그 존재에 온갖 장점들을 갖다붙인다. 그런 값싼 대가를 치름으로써 그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위선은 구역질이 나지만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의 위선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2)

 

사실 깜돌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거부감이 있다. 이렇게 쓰고 나면 누군가 내게 ‘저런, 안됐군요’라고 말할 텐데, 그게 마치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행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라고 말하고 알아요, 속상해하지 말아요, 라는 대답을 듣는 일은 쉽다. 그러나 이것은 대신 죄 사함을 받는 것일 뿐이다. 깜돌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갔을지, 깜돌이가 나를 용서했을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 깜돌이가 처음으로 꿈에 나왔기 때문에 용서받았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그저 편의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런 생각들에 대해 장 그르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장 그르니에가 타이오의 마지막까지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틀림없이 죽음과 밀접한 관련―예전이라면 이러한 관련을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견딜 수가 없다―이 있다. 만일 타이오가 살아 있다면 나는 녀석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녀석과 함께 사는 것만으로 행복할 것이며(불행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삶을 정리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다. 녀석에게 또 하나의 삶을 마련해 주고자 하는 것일까?3)

 

(…) 당신에 대한 추억이 남을 수 있다면 개에 대한 추억이 남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4)

 

깜돌이가 ‘강아지 천국’에 간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5년 정도. 하지만 이제 앞으로 영원히 개를 기를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아직도 깜돌이의 사진들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깜돌이가 우리 옆에 있었을 적의 기억은 너무나도 생생히 남아서 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게 만든다. 개 발바닥에서 나는 특유의 꾸순내라든가 코의 축축함 등의 감각이 느닷없이 날 공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들이 그렇다.

 

아침이 되면 동물들은 당신을 찾아와서 애정을 표시한다. 동물들의 하루 일과는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실천으로 시작된다. 적어도 넘쳐나는 애정을 표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5)

 

(…)어젯밤, 과일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내려갈 때, 나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았다. 부엌에 있는 바구니를 잠자리로 삼았던 개는 이제 사라졌으므로 녀석이 깨어나서 밖에 나가자고 조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염려가 내겐 더 행복한 것이었을 것이다.6)

 

방에서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녀석이 나를 방해했으면, 짐승들 특유의 그 거절 못 할 수법으로 산책을 하자고 보챘으면 하고 바란다. (…)7)

 

아침, 층계를 올라오는 녀석의 발소리를 들을 수 없음에 허전함을 느낀다. 녀석은 허락도 받지 않고 침대 위로 뛰어오르곤 했는데……. // 낮에는 그렇게 과감하지 못했다. 방 안 양탄자 위에 누워, 새털 이불 위로 올라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눈빛으로 간청하곤 했다.8)

 

6월 4일에서 5일 사이의 밤, 나는 꿈에서 타이오를 보았다. 이미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 있던 녀석은 다시 한번 내 곁에서 죽음을 맞았다. 녀석의 몸뚱이는 아주 작아져 있었다. 나는 털 없는 어떤 동물의 부드러운 살갗 같은 것으로―매끄러웠고, 흰빛이었다―녀석을 단단히 둘러쌌다.9)

 

개를 비롯하여 반려동물의 떠남이 이렇게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유는 무얼까. 아마 언어가 통하지는 않지만 교감했던 순간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와 깜돌이는 말을 나눌 순 없었지만 눈빛과 행동 등을 통해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 마음의 주고받음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깜돌이도 그때 그 순간만큼은 행복을 느꼈을까? 그랬다면 좋겠다. 함께했던 순간들 전부가 행복할 순 없어도, 행복했던 기억이 힘들었던 기억보다 많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확인할 수 없지만. 설령 지금 내 곁에 있어도 확인할 순 없지만.

 

이 리뷰를 읽는 사람들 중에 분명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당신의 고통은 충분히 알겠지만 난 이 책의 감상을 읽고 싶다고요.’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책의 한 구절을 또 이렇게 남겨놓는다.

 

개에 대해서 감상적으로 떠벌이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개를 길러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행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전혀 장애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그냥 바스라져 버릴 정도로 여린 돌조각들에, 더할 나위 없이 단단한 칼날도 무뎌지는 것이다.10)

 

사실 장 그르니에는 무언가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앞서 인용했던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타이오를 시작으로 자기 곁에 잠시나마 머물렀던 어떤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는 마지막 장에서 이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정리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사을 사랑하자. 보잘것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보다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란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11)

 

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은 물론 모든 생명체에 전부 해당되는 말이다. 하지만 개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면 또 어떠랴. 어찌되었건 그들은 우리가 사랑한 대상이었다.

 

개인적으로 『위대한 생존』 때보다 더 쓰기 힘들었던 리뷰였으며 가장 긴 리뷰가 아니었나 싶다. 제대로 된 애도일기는 아니지만, 조금 더 정리되면 언젠가 깜돌이에 대해서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이별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당신도 당신만의 애도일기를 쓰는 것은 어떨까. 그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당신만이 당신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공감할 수 있으니. 언젠가, 언젠가 ‘그때 그렇게 쓰길 잘했어’라고 미소짓는 날이 올 것이다.

 

Written by  박복숭아

 

1) 장 그르니에 저, 지현 옮김, 『어느 개의 죽음』, 민음사, 2006, p.22.

2) 같은 책, p.23.

3) p.30.

4) p.45.

5) p.57.

6) p.64.

7) p.65.

8) p.69.

9) p.71.

10) p.85.

11) p.96.

 

*이 연재물은 파주의 동네서점 땅콩문고와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였습니다. 땅콩문고에서 운영하는 책 정기구독 프로그램 <월간 땅콩문고>로 받은 책을 읽고 리뷰를 썼습니다. 땅콩문고는 2018년 11월 말을 끝으로 2년 반 동안의 영업을 마치고 문을 닫았습니다. 이 리뷰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파주에 땅콩문고라는 동네서점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