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에 관한 비전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

 

제주도에서 4·3이 일어난 지가, 칠십이 년이 지났습니다. 긴 세월이네요.

나고 자란 곳이 제주도입니다만 4·3에 대해 직접적인 경험을 해봤을 나이는 못 되고, 따로 전문적인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세월이 흐른 후에 어른들한테 이야기를 조금 전해들은 것 정도이지요. 그래도 나고 자란 곳이 제주도인지라, 몇 마디 말을 해볼까 합니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대학을 진학한 해가, 4·3이 50주년을 맞았을 때입니다. 그 상징성이 있어서 아무래도 제주 학생 동문회라든가 관련 단체들이 뭔가 요란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4·3특별법 통과라든가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같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나 지난 후의 이야기니까요. 학기 초에 큰 집회를 나갔는데, 고등학교 동창이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는 것을 만났던 기억이 나네요. 안 그럴 것 같던 친구였는데 말입니다. 아마 서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도 같지만요.

육지 사람들, 주변의 친구, 선후배들이 4·3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과서에서 “4·3사건”을 배웠고, 당시 사람들 거진 다 봤을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꽤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했으니까요. 운동권 학생들의 입문용 근현대사 책의 초입에도 4·3의 양민 학살에 대해 세세하게 다룹니다. 당시에 저도 ‘해방 후 혼돈기와 제주도민들의 투쟁과 수난, 민족의 아픈 역사, 미군정과 독재정부에 의한’ 정도로 머릿속에 새겼었지요.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헌트>가 공개된 것도 그 무렵이네요. 4·3의 배경과 양민 학살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발하는 다큐인데, 제작한 감독도, 상영한 영화제의 관련인들도 국가보안법으로 고생을 했더랬습니다. 대학에서 영화 상영을 강행하는 동안 그것을 막으려는 전투 경찰들과 지키려는 학생들이 교문에서 화염병과 최루탄을 주고받고 그랬고요. 말씀드렸다시피 4·3특별법 통과라든가 진상조사보고서 채택 같은 것은 몇 년이나 나중의 일이었으니까요.

대학의 3, 4, 5, 6월은 매달, 매주 중요한 일정이 있고, 당시의 운동권이 또 제 코가 석자인 때라 4·3 50주년은 어쩌면 저에게 하나의 시기성 이벤트처럼 지나갔습니다. 두꺼운 한국근현대사 서적에 챕터마다 자리하고 있는 그런 사건으로요.

 

그해 2학기에 교양과목으로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들었습니다. 운동권 필독서로 미리 공부한 내용이라 수월했지요. 그 중간에 자신의 가족이 겪은 근현대사의 사건을 리포트로 써오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다들 뭘 할까, 뭘 써올까 하는데 저는 제주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4·3을 써야 겠다 했지요. 때가 마침 추석인지, 아버지 제사인지가 겹치는 시기라 제주도를 내려갔습니다.

어머니와 둘이서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였을까, 저녁드라마를 보다가였을까. 저는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학교에서 이러저러한 과제가 있어서 그러는데 어머니는 4·3 때 뭐 겪은 일이 있으시냐고.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당황한 것처럼 눈빛이 떨렸고, 방바닥 어디쯤을 보면서 어머니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때 사람이 잘도 하영 죽었져….” 하고 말문을 떼었습니다. 그때 어떤, 어떤 내용을 말씀하셨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낯선 분위기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분위기에 눌려 조용히 듣고 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는 이미 오십 년이 지났는데, 그럼에도 그 얘기를 하는 걸 누가 들을까봐 무서워서 숨죽여 말을 하는구나. 그게 저에게는 하나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4·3이 47년이니까, 대략 어머니 나이가 열두어 살 무렵에 난리를 겪으셨겠다 대충 생각은 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많은 것들을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그 후 때때로 제주도 집에 내려갈 때면 한 번씩 어머니께 4·3 얘기를 물었습니다. 그렇게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4·3 시작 무렵 함께 끌려갔다 죽어서 돌아왔다는 것. 어머니의 외삼촌들이 한라산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은 것. 원래 제법 잘 살던 집이 어떻게 풍비박산 났는가 하는 것. 어머니의 어머니가 딸들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난리를 피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하는 것. 어머니는 그 소녀 시절에 어떻게 살았던가 하는 것.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그 후로 몇 년이 지나서 얘기입니다. 제가 군대를 다녀오고 학업을 마치는 사이 4·3의 역사적 위상은 큰 변화를 맞았습니다. 2000년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엔 대통령이 공식 사과를 하였습니다. 2008년엔 4·3 평화공원이 문을 열었고요. 어머니는 4·3 유족으로 기념식에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무렵이었습니다. 외가 쪽 제사가 있어서 거기 모여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4·3 60주년을 맞아 지역방송에서 이런저런 특집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모들은 돌아가시고 아프시고 해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4·3을 겪은 어머니가 방송의 내용에 말을 보태었습니다. 그날 어머니는 평소보다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말의 내용은 어두웠지만, 어머니의 얼굴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나만큼 죽은 사람 많이 본 사람도 어실 거여.” 하며 가장 참혹해야 할 사연을 말하실 때는 조금 익살스럽기도 했지요.

그렇게, 십 년 새에 어머니의 목소리의 변화를 느꼈습니다. 그런 변화에는 작고 단순한 것들부터 사회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풀고 다시 짓는 것까지 다양한 맥락이 필요했겠지요. 네,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 변화가 반가웠습니다.

 

Written by 큰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