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간』, 에세이스트보다 수필가가 될 수 있을까

20대 초만 해도 나는 소설 만능주의자였다. 아조 그냥 문학 장르 중에서 소설이 최고인 줄만 알아서, 다른 분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치만 그런 와중에도 정말 열심히 본 장르가 있었는데 바로 수필이었다. 에세이가 아니라 수필.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수필은 피천득 수필집 『인연』 가장 첫 장에 실려 있는 「수필」이란 제목의 수필이었다. 그에 따르면 수필이란,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며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하는 것이다.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좀 더 따라가면 피천득은 이런 말도 한다. 수필의 재료는 무엇이나 다 좋으며,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써지는 것이라고.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지만 그 방향을 갖지 아니하면 수돗물 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버린다고. 또한 수필은 독백이므로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라고. 정수윤이 엮고 옮겼으며 봄날의책에서 출간한 『슬픈 인간』에 들어 있는 수필들이야말로 피천득의 이 정의(?)에 가장 적합한 글들이 아닌가 싶다.

 

나쓰메 소세키의 수필은 독설가적인 면모를 띠지만 다른 한편으론 유쾌하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수필은 섬세하고 깊은 감성이 돋보이고, 이즈미 쿄카의 수필은 특유의 탐미적인 문체가 빛난다. 그 외의 조각가인 다카무라 고타로나 물리학자 나카야 우키치로가 자신에 작업에 대해 쓴 수필이나 미야모토 유리코의 페미니즘 색채가 배어 있는 우에노 도서관에 관한 수필 등, 이 글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어쨌거나 제각각 얇거나 깊은 주제를 향해 곧게 달려가고 있다. 개인적인 평을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일본 여성 문인들의 좋은 수필도 가득 담겨 있어서 더욱 좋다.

 

요새 에세이가 각광받고 있으며 나 역시 에세이집을 자주 찾아 읽고는 있지만, 피천득 선생의 정의에 부합하는 수필, 에세이가 아닌 수필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너무 옛날 수필들에 익숙해져서 현대 문체로 써진 것은 에세이, 예스런 문체로 써진 것은 수필이라고 나누고 있는 것일지도.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처음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 수필들은 엄마가 사준 교원 문학파크 전집 안에 들어 있던 것이었으니까. 거기에는 좋은 수필들이 많았다. 전혜린의 수필은 물론이고 지금은 읽어볼 수 없는 극작가 최순우의 「바둑이와 나」라는 수필도 있었다. 우리에게 「젊은 느티나무」로 잘 알려져 있는 소설가 강신재의 수필도 실려 있었다. 『슬픈 인간』 속 수필들은 특유의 올드한 문체로 담겨져 있다. 이 문체들이 어쩔 때는 참을 수 없이 그립고 또 좋다. 나는 80년대생인데도.

 

수필은 가장 가벼운 장르지만 사실 가장 무거운 장르이기도 하다. 피천득이 말한 것처럼 솔직하게 쓰면서,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않는, 그러면서도 그 글만의 방향을 갖고 올곧이 나아가는 글은 기실 쓰기 쉽지 않다. 좋은 수필을 읽는 것은 어렵지만 좋은 수필을 쓰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슬픈 인간』는 요새 찾기 힘든 좋은 수필집이다. 에세이 비스무리한 것을 열심히 쓰고 있는 지금이지만 기왕이면 에세이스트보단 이런 수필을 쓰는 수필가가 되고 싶은 요즘이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멋들어진 수필을 한 편씩 써내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싶다. 그럼 나는 그 멋들어진 수필들을 쌓아두고 읽으면서 쾌재를 부르리라.

 

*이 연재물은 파주의 동네서점 땅콩문고와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입니다. 땅콩문고에서 운영하는 책 정기구독 프로그램 <월간 땅콩문고>로 받은 책을 읽고 리뷰를 씁니다. 땅콩문고는 2018년 11월 말을 끝으로 2년 반 동안의 영업을 마치고 문을 닫았답니다. 이 리뷰를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파주에 땅콩문고라는 동네서점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Written by 박복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