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 시대라는 괴물은 너무도 쉽게 한 인간을 삼켜버린다

처음 백석의 시를 읽었던 건 중학생 때였을까. 교과서에 실려 있던 건 『여승』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었지만 문제집에는 『국수』와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 있었다. 그중에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가장 좋아했다. 언젠가 내 등에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새기고 말 거라고 결심할 정도로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교조 소속이었을 문학 선생님은 백석이나 임화, 정지용 등을 가리킬 때마다 월북한 작가들이어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백○, 정○용이라는 식으로 이름이 가려져 있었다는 얘기를 꼭 했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사실 지금까지도 그게 큰 문제라고 여기진 않았다.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을 읽을 때까지는 말이다. 난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편이 아니다. 이 책 또한 월간 땅콩문고가 아니었으면 절대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하자 난 월북을 이유로 알려지지 않았던 이 천재의 인생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현웅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천재였고 ‘힙스터’였다. 자신의 전공이었던 회화는 물론이고 만화, 삽화, 무대미술, 미술비평, 게다가 북 디자인까지 그림과 연관된 모든 분야에 뛰어들어 최고의 작업물을 선보였다. 순수미술을 추구했던 정현웅은 삽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고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는 삽화 작업이 어떤 일인지에 대해 너무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삽화는 말하자면 쓰레기 속의 미술이오, 처음부터 미술인 체 내세우는 미술이 아니다. 벽壁에 걸 것을 목적目的하고 그리는 것도 아니고, 병풍屛風을 목적하고 그리는 것도 아니다. 아침에 신문 위에 실렸는가 하면, 저녁에는 거리에 굴러다니면서 행인의 발밑에 짓밟히거나, 반찬거리를 사러 가는 아이의 싸게지(싸는 종이)가 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마는, 항상 움직이고 있는 세상의 활발活潑한 현역품現役品으로서의 역할을 가진 곳에 그 가치가 있고 흥미가 있다.”1)

 

식민지 시대와 해방 이후의 예술계를 논할 때 정현웅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백석, 정지용, 박태원, 윤석중, 이태준, 홍명희, 구본웅, 김환기 등과 친분을 쌓았으며 박목월과 황순원, 한하운을 발굴했다. 하지만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그가 남겼던 찬란한 작품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 당시 월북했던 이들이 대부분 그랬듯 정현웅의 월북도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일주일 뒤, 정현웅은 좌익성이 짙은 조선미술동맹의 서기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그는 잠시 몸을 피할 생각으로 월북을 택했다. 빈손으로 나가는 정현웅을 불러 세운 아내 남궁요안나는 급한 일이 생기면 바꿔 쓰라며 오메가 시계와 독일제 차이스이콘 카메라를 챙겨주었다. 그런데 남궁요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정현웅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시계와 카메라를 두고 가기 위해서였다. “아빠 곧 올 거야. 엄마 오면 이거 전해 주고, 엄마 말 잘 듣고 있어.” 그토록 사랑했던 4남매에게 빵을 한 봉지 안겨주며 남겼던 이 말이 남한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가슴이 아팠다. 옆 페이지에 있는 그림 <적후에서>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북한에서 정현웅은 꽤 위태위태한 삶을 살았다. 믿고 의지했던 이들은 숙청을 당했기에 정현웅은 꼬박 5년 동안 고구려고분 벽화를 모사하며 두문불출했고, 이후에는 우상화 작업을 피해 최대한 역사화나 아동화 등에 집중했다.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나름의 성과도 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작품 활동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북한 체제의 찬양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현웅은 1976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근 10년 동안을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족들을 돌보는 데에서만 즐거움을 찾았다. 1950년대 말 부르주아적 잔재라며 비판을 받고 협동농장으로 쫓겨난 뒤 1996년에 사망했던 그의 친우, 백석의 삶이 떠오르는 부분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든 빛을 내어 반짝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재능은 금세 빛이 바랜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강한 존재인 동시에 시간과 환경에게 금방 압살당하는 약한 존재다. 그렇기에 정현웅이 월북을 하지 않고 남한에 남았으면 행복해졌을 거란 말은 쉽게 할 수가 없다. 남한의 예술계 역시 분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크나큰 굴곡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쥔 자들의 구미에 맞지 않던 이들은 무자비하게 걸러져 나갔으니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어느 쪽이 그나마 최선이었을까. 다만 정현웅은 죽는 날까지 남한에 두고 온 아이들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제자들과 둘러앉아 술을 마실 때는 “나도 남쪽에 너만 한 아들이 있어”라는 말을 꼭 했고, 북한에서 얻은 두 아이에게도 남한에 너희 형제들이 있다며 유석, 지석, 이석, 현애의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의 나로선 그나마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남한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안타까이 짐작만 할 뿐이다.

Written by 박복숭아

1) 신수경·최리선 저, 『시대와 예술의 경계인 정현웅』, 돌베개, 2012, p.106.

*이 연재물은 파주의 동네서점 땅콩문고와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입니다. 땅콩문고에서 운영하는 책 정기구독 프로그램 <월간 땅콩문고>로 받은 책을 읽고 리뷰를 씁니다.

<월간 땅콩문고>는

https://docs.google.com/forms/d/1-RaNIgTmc1XKYR2lfj2NOOhp4qcO0S6XRJKNEcEvyqE/viewform?edit_requested=true 에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