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을 아십니까? – 함께하는 답사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을 아십니까?

 

누군가는 학업을 위해, 누군가는 데이트로, 또 누군가는 나들이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는지도 모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이 어디에 있냐고요? 용산 이촌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문학공동체 이음(이하 본단) 덕에 12년 만에 국박에 다시 걸음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것이 경복궁 시절의 국박이니까 사실상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본단의 학술위원회(이하 학술위)에서 진행하는 「함께하는 답사이야기」 사업의 일환으로 각처를 탐방하던 중 혹서기와 장마를 피할 겸 시대사에 대한 통사적 이해에 도움을 주는 답사를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요구를 받들어 국박을 최적의 장소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찌는 듯한 폭염의 지난 몇 달을 생각하면 신의 한 수였다 할 만하지요. 본단의 답사는 학술위장님께서 항상 수고해주셨는데, 답사 때마다 구름떼 같은 일반 관람객의 운집과 참가자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지면을 빌려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남은 답사 일정을 통해 『거란 잊혀진 유목제국 이야기』의 역자 중 한분인 학술위장님의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매진 임박이라고나 할까요?! 이 글은 삶에 치여 시간을 내지 못하시는 분들과 물리적 거리 때문에 함께하시기 힘든 분들, 뻘쭘함을 극복하지 못해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분들께 혼자 보고 듣기 아까운 답사 이야기를 들려드리기 위해 쓰게 되었습니다.

 

많은 답사 일정 중 최근에 진행된 국박 답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까닭은 그나마 야외의 사적지에 비해 낮은 문턱과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 많은 유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도 없지만 보고 들은 이야기를 견문록(?!)처럼 옮기는 것이라 미흡함이 있을 겁니다. 본단의 답사에서는 ‘백제에서 오신 분 계신가요? 부여에서 오신 분 계신가요?’라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이 말은 답사 사업의 본질이기도 한데, 우리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아 그 시대를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저 교과서를 통해 찬란했다는 역사를 그저 배웠을 뿐이지요. 이 땅의 역사가 위대한지 아닌지는 저마다의 판단이 있을 것입니다. 헌데 정말 우리가 궁금해야 하는 건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까?’가 아닐까 합니다. 본단의 답사는 그때를 살던 사람들이 어떤 관계 맺고 살아갔는가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이제 시작해 보겠습니다.

 

국박의 고대관을 들어서면 흡사 역사 교과서를 펼쳐 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주먹도끼, 반달돌칼, 민무늬토기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이 유물들 중에 특히 눈이 가는 하나가 아슐리안 주먹도끼입니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얼핏 보면 그저 큰 짱돌입니다. 주입식 역사교육의 세례를 좀 받으신 분들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세인트 슐랭이란 곳에서 처음 출토된 이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의 오래된 석기 도구로, 인류의 가장 오래된 도구들 중 하나입니다. 1960년대 즈음만 해도 한반도에서 구석기 시대 유물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해서 당시까지의 정설은 ‘신석기 시대에 이주해온 사람들이 처음 이 땅에 살았다’입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때도 주요한 식민화의 근거로 작용했는데 ‘너희는 그때부터 우리보다 늦었다’입니다. 이런 것이 해방 후  60년대를 지나면서 하나 둘 구석기 시대 유적들이 발굴되기 시작했고 식민사관과 엎치락 뒤치락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것이 70년대 후반 고고학을 전공한 주한미군이 데이트 중에 우연히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반도에 더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가 나왔으니까요. 결국 이를 본 일본 사학계가 ‘이렇게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 우리 식민지였다니 대단하지 않는가?’라고 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혹시 민족의 위대함을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만큼 역사라는 것이. 다분히 정치적이지 않는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정치적 역사 전시의 끝판왕이 바로 박물관입니다. 애초에 박물관이란 게 만들어질 때부터 그런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으니까요. 못 믿으시겠다고요? 그렇다면 좀 더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발걸음을 옮기면 ‘이 모든 것이 우연일 리가 없어’를 외치는 분들의 성전인 고조선 시대가 나옵니다. 한사군이니 동예, 옥저니 하는 이름들을 한 번쯤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쯤 되면 또 한 번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면 이 시기 한반도에 있었다는 그 고대국가들을 역사로는 편입해야 하니 전시는 해두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시는 하는데 하는 둥 마는 둥 넘어갑니다. 설명도 대충 이런 게 있어 하고 넘어갑니다. 동예, 옥저쯤을 설명할 때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빌려 그때부터 음주가무를 좋아했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게 다입니다. 찬란한 민족의 아침을 외치는 분들께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바이칼 호수로부터 왔고, 수미리국을 만들었다’류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유물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겁니다.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자기 필요한 식으로 끼워 맞추기 쉽습니다. ‘우리 역사’로 만들기 위한 노력들을 하는 것이지요. 이 시기의 토기나 검, 무덤 등의 분포를 보면 신기합니다. 가끔 한나라의 화폐도 발견되었습니다. ‘아 이때부터 자본주의 맹아론’이 하며 눈알이 커지는 분들이 계시면 우선 물 한잔 드시고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유물의 출토를 보고 ‘저기가 다 우리 땅’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분명 있겠지만 이는 교역과 교류의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때 살던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주고받은 것이지요. 지금으로 생각하면 뭐 그게 새삼스럽나 싶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력을 생각해보자면 이런 교역이 실제로 가능했나 싶을 정도로 대단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좀 더 뒤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다음은 익히 아는 삼국시대입니다. 모르는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너무나 장구한 시간이라 몇 가지만 짧게 말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즈음의 유물을 보면 화려합니다. 너무나 화려합니다. 특히 금장품이라던가 유리 세공 등은 지금 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흔히들 교과서를 통해 이 시기의 화려한 예술 양식에 대해선 배우셨을 겁니다. 특히 신라의 경우 경주 일대의 유력자들의 화려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방의 유력자들도 꿀리기 싫으니 화려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금칠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걸 본 후대인들은 이만큼 찬란한 역사라고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생활을 누가 뒷받침했을까요? 그런 이야기는 별로 안 합니다. 왜 일까요? 없어 보이거나 삿된 건 몰라도 된다는 심산일까요? 단지 동화 속 이야기는 아니니 잠깐 그 이면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철제 기구나 귀금속류의 장식품을 보면 당대의 생산력과 기술에 정말 놀라게 됩니다. 한편으론 권력과 지배력이 강대해진 고대국가가 밀어붙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금관보다 유리공예에 눈이 갑니다. 전부 손으로 잘라서 붙인 거라는데, 이것을 만들었을 사람의 건강이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당시의 장인들을 갈아 넣어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화려한 문화적 유산 이면엔 갈려나간 누군가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강대한 권력이 있었다는 거지요. 아까 위에서 무역 이야기 잠깐 했는데 저 유리구슬은 자바 섬, 즉 지금의 인도네시아에서 온 것이라 합니다. 직수입(??)을 했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겠지만 건너건너온 것이라면 좀 납득이 되겠지요? 이런 교역품의 정점을 찍는 유물은 로만 글라스입니다. 말 그대로 지중해에서 만든 유리병입니다. 이 유리병의 깨진 손잡이 부분을 금실로 감아 고정한 것을 보자면 이것이 당시 얼마나 고가였는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로마도 우리 땅 이라고 하실 분은 없으시겠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전부터 사람들은 왕래하며 살았습니다. 전쟁 질도 한몫했겠습니다만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지요. 그리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지중해에서 한반도까지 건너온 이 귀한 로만 글라스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를 말이지요.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가 건국되기 전의 시기는 또 다른 혼란기였습니다. ‘누가 기침소리를 내였어?’로 유명한 그때이지요. 고려1관의 경우 외주 전시를 통해 미술관 전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해서 이런 형태의 전시로는 고려를 설명하기 쉽지 않은 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예 못할 것도 없으니 몇 가지 인상적인 지점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개성 만월대의 청자기와였습니다. 색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의외로 고려시대 때 청자가 일상에 널리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재미있었습니다. 있는 집의 경우 사려고 하면 못 살 정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청자로 바둑판과 알까지 만들었다고 하니 말 다 했다고 할까요? 두 번째로 인상적인 것은 철불입니다. 말 그대로 철로 된 부처상입니다. 앞서 신라 때도 지방의 유력자들이 중앙의 유력자들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지요? 고려의 호족들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지방 호족들도 크고 웅장한 불상을 만들고 싶었으나 재력의 한계로 철로 된 불상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해서 불상을 보면 표현이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합니다. 또한 주조한 손을 흡사 프라모델처럼 끼워 넣었다고 합니다. 국박에서 본 철불은 손이 없었는데 팔의 위치 등을 보아 이 부처가 석가모니불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판단하는 근거는 왼손은 바닥으로 오른손은 하늘로 향한 항마촉진의 수인을 취한 팔의 모양―이때 주변에 있던 일반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이라고 합니다. 고려1관의 거의 마지막쯤에는 ‘당당한 고려 여성의 삶’이란 전시가 있었다. 이 전시의 내용은 우리가 익히 들어본 고려의 평등한 분할상속제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한번 전시 전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시대 봉양과 제사의 의무, 상속 등은 아들과 딸이 균등하였다. 결혼 후에는 주로 신부의 집에서 살았고 재산은 따로 구분되었으며, 이혼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호적에도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되었으며,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다.

고려 여성의 일상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길쌈과 바느질이었다. 이는 집안의 며느리감을 고를 때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김원의의 처는 문서 관련은 남자의 일이요, 길쌈과 바느질은 이에 준하는 부인의 일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의 여인들이 남성과 차별 없이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면서도 집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자부심을 느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전시된 유물들은 가위나 실 등입니다. 아까 박물관이 정치적인 장소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이야기를 더 강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저 위의 전시 설명문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저 뿐일까요? 바느질이 여성의 일이었기에 사회적으로 동등함을 느꼈다. 양반들이 집에 앉아 새끼 꼬는 소리랑 비슷한 겁니다. 막상 고려 여성의 삶은 평등했다는 좋은 취지의 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문구와 전시유물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라는 의문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적어도 저 전시에서 함께 간 그 누구도 고려시대 여성의 당당한 삶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음 국박 답사는 고려2관부터 진행할 예정입니다. 이제 슬슬 날씨가 좋아지니 겨울을 위해 아껴두고 또 야외로 나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정된 지면과 식견으로는 이 답사가 얼마나 좋았으며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해준 것인지 전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잘못이지요. 본단의 답사는 공부를 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입니다. 무엇이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다른 곳에서 진행하는 답사와는 조금 많이 틀립니다. 와서 듣게 되는 이야기도 색다를 겁니다.’라는 선문답 같은 대답을 답변으로 드리겠습니다. 혹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기신 분들은 시간이 허락되신다면 함께 걸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Written by 박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