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툴루의 부름

코스믹 호러

천체와 은하의 아득한 광대함을 다룬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어쩐지 서늘함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는 우주를 제대로 경험하는 것은 고사하고 상상하는 것도 벅차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요. 저는 우주의 반지름이라는 465억 광년이라는 거리나 빅뱅 직후의 온도라는 섭씨 천억도라는 숫자를 숫자로만 이해할 뿐 경험적 감각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무한에 가까운 그 공간과 시간이 인간의 신체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진 생각의 폭조차 초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죠. 거꾸로 아주 작은 것의 세계를 다루는 입자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비슷한 서늘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득한 극소의 세계에서 헤매다 보면 마찬가지로 나의 생각의 폭이 초라하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더욱 기묘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바로 내가 속한 세계,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심지어 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정작 나는 이 모든 것을 의미있게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죠.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라는 픽션 장르는 이런 가까이 있으면서도 아득한 것, 알게 된다 한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픽션으로 구체화한 것입니다. 하나의 명확한 픽션 장르로 나타난 것은 20세기 초였는데, 아마도 이 때가 과학이 밝혀 줄 우주의 진실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공존했던 시기였기 때문일 듯 싶어요. 이 장르는 태동기에 19세기 고딕 문학과의 혼합물로 탄생했기 때문에 이러한 ‘아득한 우주에 대한 공포’에 ‘악의를 숨기고 있는 쇠락한 마을’, ‘오랫동안 쉬쉬해 온 가문의 끔찍한 비밀’ 등의 고딕적 요소를 함유하고 있지요. 하여 몇몇 작품은 고딕 픽션의 뼈대를 가져와 내용물을 코스믹 호러의 감성으로 교체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고딕 픽션에서 ‘가문의 끔찍한 비밀’의 정체가 살인이나 학대 등의 인간적 배덕이었다면 코스믹 호러에서는 그것이 ‘가족 구성원들은 인간조차 아니었으며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목적 또는 충동에 따르며 지금까지 살아 왔다’는 것으로 대체됩니다. 포인트는 이 세상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설명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도입부에는 상식과 과학 지식의 범위 안에서 설명 가능할 법한 일들이 벌어지다가, 결국 그것들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으며 그런 일들이 이 우주에는 얼마든지 일어난다는 것을 화자가 깨닫고 끝나는 것이 코스믹 호러 이야기의 왕도가 됩니다. 이 장르의 가장 널리 알려진 고전인 소설 “크툴루의 부름(the Call of Cthulhu)” 때문에 왠지 코스믹 호러란 해양생물을 닮은 거대 괴수가 등장하는 픽션이라는 이미지도 있습니다만, 사실 해양생물 닮은 몬스터가 코스믹 호러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만, ‘인간의 생물학적 상식을 벗어나는 생물체’라는 점에서 기괴한 외관의 괴수들도 코스믹 호러의 감성을 대변하기는 합니다.)

이 픽션 장르는 20세기 후반에 그 모티브가 만화, 게임, 음악 등의 대중문화에 적극 차용되면서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합니다. 코스믹 호러 모티브를 사용한 최근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게임 “다키스트 던전”이 있지요. 이 게임도 코스믹 호러의 고전들처럼 고딕 픽션 분위기로 시작하다가 점차 화자들이 이 세계의 난해한 진실에 다가간다는 전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코스믹 호러 요소를 차용한 대중매체는 많이 있어서 (정통 코스믹 호러 소설의 인기와는 별개로) 코스믹 호러 소재의 인기는 당분간 식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만, 20세기 초반의 장르가 왜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혹자는 기왕의 신화와 종교가 거듭 사용되어 그 아우라를 잃은 시대에, 여전히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소재이기에 그렇다고도 하더군요.

 

크툴루의 부름 RPG

“크툴루의 부름 RPG”는 코스믹 호러 픽션의 내용을 게임적으로 재현하고자 하는 TRPG입니다. 무척 인기 있는 TRPG이고, 20세기 후반 이후의 코스믹 호러 장르의 인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작품은 1982년에 게임 회사 Chaosium에서 초판이 나온 TRPG의 고전으로 지금은 제7판까지 판갈음을 했고, 애호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최고의 TRPG로 꼽히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TRPG의 고전들은 대개 이야기 컨셉은 간결 명쾌하되 다채롭게 변주할 여지가 크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크툴루의 부름 RPG도 확실히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게임 참가자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미지세계의 탐사자“가 되어 의문의 사건을 추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단서를 모으다 보면 일련의 의문의 사건들이 사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아득한 것의 조화이자 거대한 재앙의 징후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이 아주 명쾌한 구조의 게임 얼개가 수백 가지 방식으로 변주되면서, 수많은 보드 게임, 카드 게임, 컴퓨터 게임 파생작들을 낳았습니다. 이제는 파생작인 보드 게임 ”아캄 호러“와 ”엘드리치 호러“가 크툴루의 부름 RPG보다 유명할지도 모르겠네요.

크툴루의 부름은 한국에서 2016년에 도서출판 초여명에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크툴루의 부름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TRPG입니다. 그에 힘입어 TRPG 취미 자체가 그 어느때보다 높은 관심을 누리고 있는 듯합니다. 가장 인기있는 TRPG의 숙명이 그렇듯이, 크툴루의 부름도 코스믹 호러와 관계 없이 로맨스 장르 등에 룰을 응용해서 게임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듯합니다만, 그 경우를 배제하고 셈하더라도 코스믹 호러를 TRPG로 경험하는 동호인들이 꽤 많다고 생각됩니다. 요즘은 각종 만화, 게임, 음악에서 코스믹 호러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것이 꽤 널리 알려져 있어서 해당 장르의 팬들이 코스믹 호러의 진수를 경험하고자 물어물어 TRPG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마추어 시나리오 창작도 점차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근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흥미로운 작품도 벌써 여럿 나왔습니다. 태동기의 서구 코스믹 호러가 고딕 문학을 양분 삼아 나타났듯이, 한국의 구전 설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코스믹 호러와 결합한 시나리오집이 나와 호평을 받고 있기도 하고요. 서구의 코스믹 호러가 한국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어 가는지 지켜볼 수 있어 여러 가지 기대를 하게 되는 시기인 듯합니다.

Written by 이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