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로서의 시스젠더 상상해 보기

‘같은’ 운동 사이에서도 우리는 수많은 노선의 차이를 경험하곤 한다. 최근 이러한 노선 차이가 가장 극명히 드러나는 운동 중 하나는 여성운동일 것이다. 이러한 노선 차이에 대한 지형도를 그리는 것은 분명 유의미한 일이지만, 이 글에서는 그러한 내용을, 그러니까 진영과 노선의 차이, 연대와 반목 등을 다루지는 않을 생각이다.

현재까지 온라인상의 트랜스페미니즘의 담론은 트랜스젠더퀴어의 존재에 대한 공격들을 언급하고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을 위주로 움직여 온 듯하다. 하지만 반론이 아무리 반복되어도 혐오의 논리는 여전히 같은 공격을 반복한다. 이러한 공격에 대해 일일이 다시 말하는 것조차 당사자에게는 만만치 않은 피로감을 느끼게 한다.

트랜스젠더란 ‘지정받은 성별에 불일치를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분법적인 트랜스 남/녀를 포함해 그 외의 모든 젠더들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트랜스젠더 담론이 발달하면서 트랜스젠더의 반대항으로서 즉, ‘지정받은 성별을 자신의 젠더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시스젠더’라는 단어가 형성됐다. 하지만 반대항으로서의 다수가 ‘시스젠더’로 존재하는 지금까지는 ‘시스젠더’가 정상이고 ‘트랜스젠더’가 이를 벗어난 존재처럼 다뤄지곤 한다. 이제 우리는 한 차원 다음 단계를 생각해 볼 차례다.

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실 시스젠더에게는 이를 이해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다. 더 나아가 이해를 하고 싶다며 ‘진정성’을 요구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 담론에 익숙하지 않은 시스젠더라면 이쯤에서 반문할 법하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러한 질문을 마주할 때면 나는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면 대부분 반론을 하는데, 이 반론의 대부분은 “화장실/목욕탕은?”이다. 이 해묵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앞서 지나왔던 수많은 담론을 다시 꺼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다면 안심하시라, 시스젠더인 당신이 누군가를 그의 젠더로 인정해준다고 해서 그가 그의 젠더로 온전히 받아들여지기엔 아직 사회라는 장벽이 있다. 시스젠더가 자신의 젠더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는 염색체나 성기 혹은 의사의 선언, 외모 때문이 아니라, 이전에 사회라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사회라는 시스템이 견고하지 않다는 데 있다. 당신이 당연히 같은 성별이라 여기는 그 사람이 트랜스젠더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당신은 그가 다른 성염색체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성기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법적 성별이 무엇인지 결코 ‘완벽하게’ 알아볼 수 없다.

트랜스젠더의 존재의의는 이러한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점이다. 트랜스젠더퀴어는 필연적으로 견고한 젠더 이분법을 허무는 존재다. 비록 그가 이분법적인 사회에 온전히 숨어 지낸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그 주변인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이후, 트랜지션을 경험해나가며 나는 사회가 가장 견고하게 여기는 성별이분법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지 체감해 나가고 있다. 내 젠더 표현만으로도 사람들은 나를 특정 성별로 패싱하며, 그런 내 모습에 이전에 알던 지인들은 절교를 선언하기도 한다. 사회의 제도는 ‘당연하게’ 나를 지정 성별에 가둬두고 여기에 맞출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법과 제도가 필요하지 않은 개별공간에서 나는 내 젠더로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같은 사회’ 안에서조차 내 성별은 맥락에 따라 동일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실 이는 시스젠더 역시 마찬가지다. 시스젠더조차 그가 처한 법적, 제도적, 육체적, 외모적 차이에 따라 수없이 많은 성별로 읽히고 있다.

성별은 결코 견고한 이분법으로 구축되어 있지 않다. 인터섹스의 존재는 성별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들의 성장, 정체화 과정을 통해 지정받는 성별과 신체의 성별과 정체성으로서의 성별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젠더퀴어-논바이너리 담론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성별, 각자의 성별에 대한 단서를 얻고 있다. 성별의 이분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젠더는 차츰 지금보다도 다양해질 것이다. 인간 모두 각자가 자신의 젠더로 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트랜스젠더는 시스젠더의 반대항이 아닌 상위개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수많은 트랜스젠더 중 하나로서의 시스젠더를 이제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의 의미를 조금만 더 확장해 보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존재’를 우리는 트랜스젠더라 지칭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립하며 성장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두 트랜스젠더라는 선언 또한 가능하다.

사실 대부분의 비성소수자는 트랜스젠더를 직접 마주하기가 어렵다. 본격적인 트랜지션과 커밍아웃 전부터 보아왔던 필자의 논퀴어 지인들은 대부분 ‘자기 주변에서 처음 본다’고 말했다. 정말로 트랜스젠더의 수는 얼마나 될까? 안타깝게도 이에 관한 통계는 사실상 전무하다. 트랜스젠더퀴어중 자신을 드러내어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의 경우 성별정정을 마친 후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드러난 트랜스젠더퀴어 중 트랜스-인권 담론에 참여하는 이는 더욱 적다.

페미니즘이 말하는 것이 ‘여성은 인간이다’인 것과 마찬가지로, 트랜스페미니즘이 말하는 것은 ‘트랜스젠더퀴어는 인간이다’라는 것이다. 최소한 인간답게는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운동이 자신의 운동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다면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는 지나치게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자. 그리고 시스젠더로서의 트랜스젠더성에 대해서 고찰해보자.

 

Written by 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