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사소한 북방민족 사용법

고등학교 시절 우리는 고려에 대해 배웠다. 고려시대는 크게 정치-경제-사회-문화로 나뉜다. 정치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관직과 함께 조선시대의 삼사(감찰기관)과 고려시대의 삼사(회계기관)이 다르다는 것을 배웠다. 경제 부분에서는 어려운 세금계산법을, 사회 부분에서는 여성들의 권리가 조선과는 사뭇 달랐다는 점, 문화에서는 지금도 만들기 어렵다는 고려청자와 수준 높은 금속공예들을 살폈다.

신라시대 골품제에서 너무 힘을 뺀 탓일까. 국사 선생님은 지쳐 있는 학생들에게 고려시대의 거란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희라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 오로지 협상을 통해 고려를 구했지. 하지만 그에 비해 거란은 너무나 잔인하게 정복했어. 송나라는 협박을 당했고, 은과 비단을 바쳐야만 했지. 협박을 당한 거야. 언제 자신들이 멸망할지 모르니까.”

특히 서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배웠다. 만약 서희가 말을 엄청 못해서 저 잔인한 거란족에게 고려가 멸망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한국어를 쓰지 않고 중국어를 쓰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수능에는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사학과에 입학해 수업을 들었다. 고려시대는 여전했다. 책은 좀 더 두꺼워졌고, 고려라는 국가는 대한민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한 위대한 나라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싸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버티는 것이구나.

역사 전공자가, 더욱이 고려시대 전공자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과거의 경험을 꺼내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우리는 고려의 입장만 강요당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식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거란은 정말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오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낡은 옷만 입은, 그을린 사람들일까. 그들은 무엇을 잘 했으며, 왜 고려까지 내려와야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쯤 운 좋게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림1 당시 2015년 당시 답사 코스 ⓒ이민기, 2015

2015년 여름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8년 더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해의 더위도 대단했다. 한 시간의 비행과 5시간의 버스 탑승 끝에 거란의 중경성 유적에 도착하여, [그림 2]의 거대한 탑과 마주했다. 거대한 몸집과 어울리지 않은 섬세한 불상들과 조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광경이었다. 탑 한 바퀴를 도는 데 15분이 걸렸다. 나는 하늘 높이 솟아있는 탑을 보고는 깨달았다.

‘거란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한 가지도 없어!’

             

그림2 요 중경성 대탑 ⓒ이민기, 2015            그림3 내몽고문화출판사의 거란왕조 표지

[그림 1]의 답사 코스를 6박 7일 동안 돌면서 수많은 유물과 유적지를 살폈다. 죽은 왕족의 얼굴에 덮었던 황금가면과 집채만 한 무덤들은 당이나 송의 여러 무덤과는 확실히 다르면서도 웅장한 맛이 있었다. 고려의 해동통보가 거란의 유적지에서 나온 것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서로 관계가 나빠도 물자는 교역했다는 사실이 몸으로 다가왔다. 거란 유물에 화려함과 정교함도 무의식적으로 눈에 익어갈 때쯤, 에어컨을 쐬다가 양심에 찔려 박물관에 있던 조그마한 책방에 갔다. 같이 갔던 선생님께서 책을 한 권 보고 계셨다. 그 책은 중국 CCTV 채널 10에서 방영하고 있는 인기 다큐멘터리인‘탐색과 발현’의 스토리 북이었다. ‘거란왕조(契丹王朝)’라는 제목의 이 책은 한국의‘역사스페셜’과 비슷했다. 우리가 알던 역사책과는 달리 많은 사진과 그림이 가득했다. 그래서 내심 이 책이 이만저만한 이야기책인지 알았다. 문장도 몇 개 없는 것이 번역하면 얼마나 걸릴까 싶었다. 그리고 3년 뒤에 깨달았다. 한문은 원래 문장을 짧게 쓰는 것이 미덕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후 번역하자 텍스트의 길이는 두 배가 넘었다.

사설이 길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거란은 배웠던 존재와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우리는 특이성을 통해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다름은 너무 자주 틀림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대로 된 ‘다름’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거란은 우리와 달랐다. 한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거란의 포용성은 주목할 만 했다. 거란은 자신에게 필요한 한족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한족은 한족의 관습에 따라 다스린다’는 원칙은 그들의 집단반발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거란인을 다스리는 관청과 한족을 다스리는 관청을 따로 두었는데, 이러한 통치체제의 다양성은 인구가 적은 민족이 문화 기반이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때 유용하게 작용했다. 나아가 이 점은 거란이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다양한 문화권을 어우르는 큰 국가를 형성하고 운영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당시 지배계층의 여성권력에 대한 태도 또한 흥미롭다. 거란의 태후는 아들이 황제가 되면 권력을 양분했다. 나아가 자유롭게 재혼도 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배운 내용에서 황제 또는 왕들의 권력은 상식적으로 양분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조금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할머니와 손자가 싸우고, 자신의 팔목을 자른다. 한국의 역사와는 다른 결들을 톺아보면서 이들을 단순한 ‘오랑캐’로 얕잡아 볼 수 있는 존재들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타인의 다름을 얼마나 정책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을까?

당시 아시아의 트렌드는 조금 달랐던 듯하다. 각자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방법들을 자신들의 시공간에서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고, 문화적 다양성은 국가 단위로 지켜지고 있었다. 적어도 천 년 전의 동아시아에서는 다른 세계들이 각자의 주체성을 지키고 살고 있었다. 송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는 거란-송-고려로 확장된다.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다. 과연 고려는 거란을 몰랐을까? 거란은 송을 몰랐을까? 송은 고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고려시대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로 완성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중국에서 거란은 자신들을 형성할 수 있었던‘다민족체계’로서의 중국, 즉‘하나의 중국’의 역사적 배경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다. 그리고 현재‘거란족’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역사상 거란은 독자적인 국정운영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결국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여 동화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금나라와 원나라를 거치면서 한족보다 더 한족다운 관료집단으로 거듭났다. 거란 황족의 후예였던 야율초재는 금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거란족의 성씨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한 한족의 문화는 결론적으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는 큰 구심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현재 중국 체제를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결국 한족화될 다른 소수민족들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3년 만에 개인적인 숙원사업이 끝났다. 지도 교수님의 정성 어린 지도에도 불구하고, 긴 시간에 불만과 어려움이 가득한 첫 번역 수업이었다. 수업의 결과라고는 너무 거창하다고 말하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번역은 단어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어렵게 배운 탓일까. 처음 번역하고 너무 큰 칭얼거림을 하는 게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부디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Written by 이민기 (학술위원회)

 

*인문학공동체 ‘이음’의 학술위원회장을 담당하고 계시는 이민기 선생님의 첫 번역작 『거란 잊혀진 유목제국 이야기』(쳉후이 저, 네오, 2018)는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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