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어 본다, 『미오, 나의 미오』

*이 글에는 『미오, 나의 미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년 전 『미오, 나의 미오』를 교하 어린이도서관에서 처음 읽었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까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초면은 아니었다. 어릴 때 린드그렌의 대표작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은 애니메이션으로 접했고, 조금 큰 뒤에는 『낭길리마』라는 만화로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알았으니. 초등학생 때 학급문고에 『산적의 딸 로냐』가 꽂혀 있기도 했다. 이렇게 친근한 작품들을 두고 『미오, 나의 미오』를 집어든 건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약간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표지 일러스트도 예뻤고.

그러나 한 시간 뒤, 나는 어린이도서관의 알록달록한 기둥 뒤에 숨어서 눈물을 참고 있었다.

 

『미오, 나의 미오』는 조금이라도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시 읽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책이기도 하다.

보 빌헬름 올손, 줄여서 보쎄는 에들라 아주머니와 식스텐 아저씨에게 입양되었지만, 그 둘은 보쎄를 불행의 근원이라 부르며 구박한다. 그래서 보쎄는 늘 집에서 겉돈다. 그러던 어느 날, 심부름 때문에 밖에 나간 보쎄는 머나먼 나라로 떠나 진짜 아빠를 만난다. 보쎄라는 이름 대신 너무나도 다정하게 ‘미오, 나의 미오’라고 부르는 임금님 아빠를 말이다.

보쎄가 미오라는 이름을 찾은 세계, 머나먼 나라는 보쎄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사람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새로 만난 친구 윰윰은 보쎄의 친구 벤카와 닮았고, 윰윰의 엄마는 보쎄에게 종종 사탕이나 과일을 주곤 했던 과일가게의 룬딘 아주머니와 닮았다. 임금님 아빠가 선물한 말 황금 갈기를 가진 백마 미라미스는 보쎄가 사랑했던 양조장의 늙은 말 칼레 푼트의 눈을 갖고 있다. 보쎄는, 아니 미오는 이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며 초원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별을 보며 피리를 불고, 미라미스를 타고 구름 위를 날기도 한다. 이처럼 행복한 세계지만, 미오는 머나먼 나라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바깥쪽 나라의 기사 카토 때문이다.

머나먼 나라에서 기사 카토는 두려움의 대명사다. 기사 카토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동물들은 비명을 지르고, 꽃들은 저절로 진다. 논노의 형들도, 이리의 막냇동생도, 꿈을 짜는 아주머니의 어린 딸도 잔인한 기사 카토가 잡아가 버렸다. 미오에게는 사명이 있다. 바깥쪽 나라에 사는 기사 카토와 맞서 싸우고, 그가 잡아간 수많은 사람들을 풀어줘야 하는 사명이.

『미오, 나의 미오』는 충실하게 영웅 서사 구조를 따르고 있는 작품이다. 조지프 캠벨은 그의 작품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모든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서사의 기본적인 구조를 출발-입문-귀환으로 정리했다. 미오 역시 일상세계에서 머나먼 나라로 들어가 기사 카토와 맞서는 시련을 겪고, 마침내 돌아와 진정한 영웅이 된다. 서사뿐 아니라 세세한 문장 역시 고대 영웅 서사와 닮아 있다. 운율과 대구를 맞춘 문장들을 가만히 따라 읊다보면 고대 서사시의 한 부분을 읽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하지만 이런 서사 구조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영웅 서사를 가장 많이 접했을 때는 언제인가? 바로 어릴 때다. 보쎄는, 미오는 한창 그런 영웅 서사를 많이 접할 나이다.

미오는 절망에 빠졌을 때마다, 힘이 필요할 때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임금님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일어난다. 아주 다정하게 ‘미오, 나의 미오’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 또한 미오는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아빠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생각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둘은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묶인 관계다. 미오가 보쎄이던 시절 경험하지 못했던 관계. 용감하게 기사 카토를 물리친 미오 왕자는 임금님 아빠와 재회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처럼 보이지만….

엔딩은 독자의 기대를 기묘하게 저버린다. 여기서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또렷하게 현실의 보쎄를 그려낸다. 테그너 공원의 가로등 밑 나무 의자에 앉아서, 황금 사과가 아닌 그냥 사과를 먹으며, 머나먼 나라로 보쎄를 이끌었던 거인이 들어 있지 않은 빈 맥주병을 가지고 놀고 있는 보쎄를. 그리고 보쎄는 말한다. “그 애는 머나먼 나라에 있어, 하고 나는 말한다.”

이 이야기의 엔딩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모든 것은 보쎄의 현실도피성 상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더 이상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맨 마지막 문장이 그렇듯, 보 빌헬름 올손은 머나먼 나라에 살면서 임금님인 그 애 아빠와 함께 정말로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이 너무나도 아플 테니까.

불행한 현실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보쎄가 그랬듯 상상 속으로 도피한다. 사실은 난 대단한 존재고, 진짜 부모가 나를 찾고 있으며, 그 사람들만 만나면 매우 행복해질 거라고. 그 상상에서 깨어난 뒤 마주한 현실은 어느 정도 버틸 만하기도 하고, 오히려 더 참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상은 혼자만의 것이고, 그래서 나는 늘 외로웠다. 같은 상상을 하는 아이가 옆에 있었더라면…. 그렇기에 나는 『미오, 나의 미오』를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아쉽다.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가만히 다가가, 이 책을 건네 본다. 아아, 보쎄만 할 때의 내가 이 책을 읽었더라면 조금 덜 불행했을까. 아니, 오히려 『미오, 나의 미오』를 늦게 만났기에 이 책의 가치를 마음 깊이 느끼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내 안에 상처받으며 자란 아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읽어도 좋고, 홀로 상상하며 힘든 현실을 버티는 아이에게 선물해줘도 좋은 책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상상으로 도피해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모든 아이들이 머나먼 나라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Written by 박복숭아

 

*이 연재물은 파주의 동네서점 땅콩문고와 함께 만들어가는 콘텐츠입니다. 땅콩문고에서 운영하는 책 정기구독 프로그램 <월간 땅콩문고>로 받은 책을 읽고 리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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