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나는 설친다 – 박근혜 국정농단과 여성혐오

달을 가리키는 데 손가락을 본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을 비판하자고 하니, 여성 박근혜를 비난한다. 여성혐오 발언이 금지되었던 사회에서 지금이 기회라며 풀어준 것처럼 여성혐오 발언이 널뛴다. 우리는 그 널뜀을 피하지 않는다. 불편하지만 참는 것이 아닌, 떠나버리는 것이 아닌, 우리는 끊임없이 거리에 나서고, 외치고, 설친다.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었다고 사과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말한다. 신중하지 못한 발언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발언이었기에 분노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여성이면서도 여성이 아닌 사람이었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라는 것 외엔 여성과 거리가 멀다’ ‘생식기만 여성이다’라는 발언은, 우리에게 ‘여성은 누구라고 지칭되는가’하는 질문을 던져준다. 여성은 자궁의 존재여부와, 주민등록상 번호로 규정되지 않는다. 이분법적 성별 규범에 따른 이 발언은, 섹스와 젠더를 구별하며 싸워왔던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돌릴 뿐만 아니라,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발언이다.

 

여성이라는 것과 박근혜가 여성을 대표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박근혜는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나와는 나이, 계급 등 다른 점이 너무나도 많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남성을 대표했는가.

국정농단은 여성 리더십의 실패가 아니라, 박근혜 카르텔의 실패다. 이전 대통령들의 문제를 남성의 문제로 보아왔던가. 정치는 남성이 “해야 할 일”로 인식되어 왔고, 남성이 문제를 일으켜도 성별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았다는 것은,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이 박영선 국회의원에게 “대한민국에서 앞으로 100년 내로는 여성 대통령 꿈도 꾸지 마라”고 한 발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순실이라는 사람이 등장한 후, 사람들이 가장 분노하고 황당해했던 지점은 “무당”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여성이 등장하였고, 교수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무당에 휘둘렸다는 것이 큰 공분을 샀다. ‘무속은 어리석은 아녀자들이나 믿는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에 무속인들은 최태민, 최순실 일가는 무당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표하기도 했다. 오방색 자체가 오해되어 오방끈은 황교안 총리에게 선물로 안겨지기도 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근본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 발언으로, 장애인 혐오 발언과 함께 혐오발언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근본 없는’이란 표현은 “한국 사회에서 다른 종교와 달리 재력과 권력을 지니지 못한 샤머니즘의 ‘무당’과 그 가족에 대한 비하”와 한국 사회가 가진 근본에 대한 집착―학연중심주의, 지연중심주의, 남계혈연중심주의, 인맥중심주의―을 보여준다. ‘저잣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공간으로, 저잣거리가 “하찮은 공간이라는 암시를 담은 이 표현은, 보통 사람들을 ‘개-돼지’로 표현한 어느 정치인의 레토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녀자’는 ‘별 볼 일 없는 결혼한 여자’라는 비하적 표현으로 사용된다. “‘어린이와 여자’를 아울러 쓰이는 개념 자체도 사실상 성차별적인 가치를 드러낸다. 여성을 아이와 같은 범주에 넣어서 생각하는 이 사유방식은, 여성은 ‘영원한 미성년자’라는 인식으로 인해,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았던 가부장제적인 남성중심주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박근혜 국정농단을 둘러싼 혐오 발언은 아녀자뿐만 아니라 아줌마, 미스 등 성차별적 호칭이 “쉽게” 등장했다. ‘아줌마’는 결혼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성“을 상실한 여성을 비하적으로 표현하며, ‘미스’는 여성을 결혼여부로 나누는 호칭이자, 보통 그 직위에서 제일 낮은 사람을 낮추어 부를 때 사용된다.

2016년에 미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맞지 않지만, 대통령을 약한 여자로 지칭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정윤회 전 박근혜의원 비서실장이자 최순실씨 전 배우자는 “약한 여자를 보면 지켜주고 싶”다고 하였으며, “지금처럼 잡음이 나오게 된 건 이혼 뒤 (최씨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불찰이다”라며 “여성은 남성에게 관리되어야 할 존재”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2016년이 시작하기도 전에 ‘박근혜 병신년’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사회자, 시민발언대, 지나가는 사람들 등, 촛불집회 현장에서도 넘쳐났다. 장애인 비하 발언은 ‘병신년’, ‘미친년’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KBS를 지나갈 때 ‘개병신’을 외쳤고, 부부젤라로 ‘○○는 바보래요’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일상”이었다. 박근혜는 정신장애,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때도 그러했듯이 장애인은 잠재적 범죄자가 되었다. 집회현장에, KBS를 지나갈 때 장애인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대통령 사생활에 관심 가지는 자 누구인가. 유영하 변호사는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 사생활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 달라”며, 국정농단에서 대통령이 아닌 여성으로서 박근혜를 호명해 분노를 샀다. 우리는 박근혜의 사생활이 궁금하지 않다. 박근혜가 드라마를 좋아하든, 성형수술을 했든, 태반주사, 백옥주사, 마늘주사를 맞았든, 비아그라를 먹었든 궁금하지 않다. 대통령이 공적 업무 시간에 세금으로 무엇을 했는지 대통력의 책임을 묻는 자리에, 여성의 사생활이라며 숨지 말라.

박근혜 대통령의 외모 “풍자” 또한 많다. 앞서 말했듯이, 박근혜가 어떤 시술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TV 방송에서 나경원 국회의원이 더 예쁜지,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더 예쁜지를 겨루는 모습을 보면서, 여성 정치인에 대한 외모 평가가 남성 정치인보다 더 가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 여성 정치인이 정치 이미지를 위해, 외모를 가꾼다하여 비난할 수 있는가. 박근혜의 옷 스타일, 화장법을 찬양하던 언론이 박근혜, 최순실, 정유라의 외모를 앞서서 비난한다. 그들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으며, 외모지상주의에 살고 있는 개인으로서 자유롭지 못하다하여 비판할 수 없다. 더불어 정유라의 임신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야 말로 사생활이다. 정유라의 중졸을 비웃는 것도 보고 싶지 않다. 이 사태는 정유라의 학력·학벌의 문제가 아니다.

 

주진우, 정두언의 섹스 동영상 발언은 여성에게 섹스 동영상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한 발언이다. 동영상의 존재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동영상이 존재한다고 해도 유포되는 것은 명백한 범죄다. 동영상 촬영에 대한 박근혜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유포는 박근혜의 동의 없이 이뤄지는 디지털 성범죄―리벤지 포르노―가 될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마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디저털 성범죄에서 안전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여성, 청소년은 한 명의 정치적 주체로 거리에 나섰다. 이들이 촛불집회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냥 가벼울 수 없었다. 여전히 여성은 “꽃”으로 소비되었고, 청소년들은 ‘기특하다’고 여겨졌다. ‘공부하기 싫어서 집회에 나왔다’ ‘선동당해서 나왔다’ 등 청소년을 정치적 주체로 보지 않는 발언들과 함께 ‘애들 잘 키우셨네요’ ‘아이들이 우리의 희망입니다’라는 발언도 끊이지 않았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나 아이, 청소년은 미래의 주체로 호명된다.

‘얼굴도 예쁜 것 같은데 왜 마스크로 가렸냐, 벗어보라’는 발언이, 집회현장 성폭력의 끝이 아니다. 성추행으로 체포된 남성도 있었으며, SNS에 여성들의 성추행 피해 제보는 넘쳐난다. 슴만튀, 엉만튀를 당했다는 제보와 함께 ‘촛불집회에 가면 슴만튀, 엉만튀 할 수 있냐’는 글들도 올라온다. ‘여고생 보러 촛불집회 나간다’ ‘헌팅 하러 나간다’는 글도 많다. 이들의 집회 참가 후기는 집회에 참가했던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며 끝이 난다. 흔히들 아름다운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평가 받는 자에게 권력이란 없다. 평가하는 자에게 권력이 있다.

촛불집회가 평화적이라며, 언론은 사람들의 미담을 끊임없이 보도했다. 비장애 남성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이 아니었던가. 여성,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도 현재를 살아가는 정치적 주체로 안전한, 평화적인 집회를 하고 싶다.

 

우리는 거리에 나서기 전 ‘평등한연대’의 ‘평등한 집회를 위한 7규칙’을 보며, 다시 한 번 나를 점검할 것이고, 페미존에서 우리의 연대를 확인할 것이고, 재밌고 다양한 페미니스트 깃발 뒤에서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박하여행(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의 집회 모니터링을 보며 더 나은 내일을 고민할 것이다.

우리는 예민한 것도, 분열주의자도, 친박페미도 아니다.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를 줍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박근혜 국정농단을 여성의 문제로 가리지 말자고 외치는 것이며, 소수자 혐오와 민주주의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외치는 것이다. 나는 설친다. 나를 위해 그리고 너를 위해.

 

 

Written by 오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