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랬더니 – 2560번째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I. 여는 말

 

세계가 전쟁준비와 전체주의로 미쳐 돌아가던 1930년대,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진 불교 종파였던 정토진종(浄土真宗)은 교단 내에 ‘전시교학지도본부(戰時教學指導本部)’와 ‘흥아부(興亞部)’라는 이름의 기구를 설치한다. 이 기구들의 역할은 불교의 이름으로 군인의 사기를 진작하고 전시 민간인 동원을 사상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승려들은 병사들의 전쟁 수행을 독려하는 법회를 열고, 위문품 모집과 발송을 진행하고, 귀환병들에게 축하 의식을 베풀고, 민간인에 대한 ‘시국교화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기구는 군국주의 체제 안에서 충실한 전쟁 선전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1937년에 이르면 정토진종 본원사파는 정권의 ‘국민정신총동원령’에 화답하여 세 가지 전쟁 지원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세 가지 전쟁 지원 운동이라 함은, 매달 가정에서 한 그릇씩의 공양미를 모아 출전병사 가족에게 전달하는 일완미 운동, 휘장을 개당 십 전에 팔아 군수자금에 보태는 보국장 운동, 사찰의 전통적인 사회 복지 기능을 유용하여 전시 노동력을 제공하는 린보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들에는 교단의 상위기구는 물론 중간 기구와 말사에 이르기까지 교단의 모든 조직이 동원되었다.

요컨대, 군국주의 시대에 일본 불교는 종파를 막론하고 정권 비호와 전쟁 활동에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개중에는 승려의 신분으로 입대하여 전쟁행위에 참가한 경우도 있었다.상대적으로 약한 교세를 가졌던 임제종과 일련종 역시 세력이 작으면 작은 대로 힘 닿는 데까지 천황제 군국주의에 협력하였다. 임제종의 고위 선사들은 천황 숭배 사상의 논리를 개발하고 극우단체에 가담하여 테러리즘을 수행하였다. 일련종은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과정을 도와 정적 암살과 쿠데타를 지원하였다.

극단의 시대에 학살 정권에 봉사한 부역자들의 과에 대해서는 누구나 이런저런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인으로서 부역한 이들에 대해서는 한층 복잡한 감정이 들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억조창생 만물에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자비의 부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전쟁을 지지하고, 때로는 몸소 전장에 나서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인가? 그들은 그 때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II. 부처를 섬기듯 천황을 섬겨라

 

근대 일본 불교계의 친정권적 행동양태는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 정권의 불교 탄압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메이지 시대 전까지 불교는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와 1천년 가까이 공존하면서 이른바 신불습합이 충분히 진행되어 두 종교의 경계가 희미해진 상태였다. 1868년에 출범한 메이지 정권은 도쿠가와 막부와 유착되어 있었던 불교 권력을 억누르고 메이지 정권 고유의 통치사상인 국가신도를 확립하기 위해 신불분리령을 선포한다. 신불분리령에 의해 신관과 승려 사이에서 신분이 모호하던 승려들은 강제 환속되고, 불상을 비롯한 불교 상징물들이 신사에서 철거되었다. 신불분리령은 단순한 두 종교의 분리가 아니라 불교 세력이 관과 민간으로부터의 모욕과 폭력(이른바 폐불훼석廃仏毀釈)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을 의미했다.

왕법불법론이 정권의 주구가 되자는 욕망만으로 허공에서 튀어나온 객설은 아니다. 이 사상의 연원은 용수(龍樹)의 「중론」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중론」의 주요 교설 가운데에는 진속이제 사상이 있는데, 이는 형이상의 진리의 세계[眞]가 형이하의 세속 세계[俗]와 협응하며 상호작용한다는 사상이다. 왕법불법론은 「중론」의 중관 사상을 극히 피상적으로 읽고 왜곡한 결과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진속이제의 교설은 언어화할 수 없는 진리를 언어로 전달하는 문제, 수행하는 사람이 속가의 사람에게 포교할 때 생기는 문제를 다룰 때 주로 쓰여 온 개념으로, 지배자를 신격화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왕법불법론은 진=부처, 속=천황으로 아무 사색 과정 없이 등치시킨 데에 그 논리의 얄팍함이 있다.신불분리에 의해 비호 권력을 잃어버린 불교계는, 살아남기 위해 정권에 엎드려 기기로 했다. 철저히 정권의 입맛에 맞는 행보만을 밟음으로써 정권에 밟히는 일을 최대한 유예하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새로운 호국불교론의 교리를 고안하고 1869년에 열린 불교회합 교토제종동덕회맹(京都諸宗同德會盟)에서 그것을 천명하였다. 그것은 ‘임금의 법과 부처의 법이 다르지 않다’는 교설로 왕법불법불리론(王法佛法不離論)이라 불렸다. 메이지 시대에 이 교설은 천황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읽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메이지 정권도 통치에 불교를 이용하는 것의 유용성을 깨닫고 불교계의 자발적 어용화를 반겨 받아들였다.

 

 

III. 만사가 여일하니 生과 死는 다르지 않느니라 (그러니, 죽어라)

 

메이지 시기에 대두한 왕법불법론은 불교 교리에 대한 오독에 근거할 것일지언정, 전쟁이나 학살을 본격적으로 옹호하는 교설은 아니었다. 그 논리의 구조상 그것은 아무리 왜곡되어봐야 유교적 충(忠) 사상을 모방하는 수준에 그치는 전근대적 지배 사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본 사회의 군국주의화, 파시즘화가 정점에 달한 1930년대가 되자 또 다른 유형의 (유교적 충 개념 이상으로 호소력을 가진) 호전적 사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쯤 불교의 교설을 이용하여 학살을 옹호하는 왜곡되고 뒤틀린 논리가 대두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선불교의 공/무아 사상을 이용한 전쟁옹호론이다.

선불교는 오랫동안 색즉시공, 공즉시색 등 단순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어법(“공안”)을 그 가르침의 주된 수단으로 삼아왔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모순 어법의 이면에 잠재한 심원한 진리를 사색하는 것이 선불교 수행의 기본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모순을 이용하는 이 섬세한 교습법이, 명확한 목적을 가진 이의 손에 들어가면 아무것이나 다 정당화할 수 있고 아무것이나 다 반대할 수 있는 만능의 논리를 구성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일테면, 일체가 무(無)이고 자아가 허상이라는 오래된 교설은 군국주의의 문맥 속에서 다음과 같이 살인이라는 패륜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포장하는 옷이 된다.

 

“치켜든 칼에는 자신의 의지가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텅 비어 있습니다. 그것은 번갯불과 같습니다. 칼에 맞아 막 쓰러지는 사람 역시 텅 비어 있습니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알맹이가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 텅 비어 있고, ‘마음’이 없습니다. 칼로 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손에 들린 칼도 칼이 아니며, 막 쓰러지는 ‘나’는 번갯불 속에서 봄의 미풍이 길게 일자로 찢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다쿠안 소호)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며, 삶이 죽음과 다르지 않고 죽음이 삶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 역시 사람을 살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거리낌없이 사람을 죽이고 거리낌없이 목숨을 버려라. 이런 식의 논리는 선불교 공안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역설, 은유, 함축을 깡그리 무시하고 언어 표현의 표피만을 이해하는 키보드 워리어식 독법의 산물이지만, 전쟁에 미쳤던 시대에는 고명한 선사들마저 이런 논리를 구사하였다.

 

“부처님의 자애로운 삶을, 삶 다음에 죽음이 오는 순환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생사’는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강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에서 죽은 것으로 변하는 문제가 아니다. 부처님의 자애로운 삶은, 삶도 죽음도 모른다. 그것은 단지 생사일여의 문제일 뿐이다.” (히라타 세이코)

 

위와 같은 발언이 평화로운 암자에서 벌어진 선문답 가운데 나온 것이라면, 삶과 죽음에 대한 심원한 통찰로 이해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교설은 암자가 아니라 1940년대 일본군 병영에서 자살 특공대가 출정 전에 배우는 교리였다. 생과 사가 다르지 않으니 걱정 말고 죽으라는 격려의 메시지로 쓰였던 것이다. 선불교의 은유들이 얼마나 심오한 깨달음의 결과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로 가치 있는 인류의 유산인지 여기서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군부와 그 부역자들이, 선불교의 은유들을 철저히 피상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군대의 윤리적 파행을 무마하고 자살 특공대를 세뇌하는 논리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는 것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IV. 맺는 말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하자. 일본 불교계는 메이지 시대의 불교 탄압을 계기로 친정권의 논리를 개발하기 시작해, 중관/삼론 사상을 왜곡하여 왕법불법불리론이라는 천황제 충성 논리를 만들어 내었다. 군국주의 시대가 되어 전쟁과 학살을 옹호하는 교리가 필요해지자, 불교계는 공/무아 사상을 왜곡하여 학살과 자살 공격을 독려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었다.

현대의 우리에게 자비의 종교, 평화의 종교로 알려진 종교가 극단의 시대에 벌인 만행을 보면서, 새삼 종교는 정치의 몸종일 뿐인가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이름난 종교들은 제각각 정교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정치적인 요구에 따라 그 정교한 교리를 미세하게 비트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종교 지도자들은 심오한 깨달음과 고매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자신의 사상을 현실적 압력에 따라 변형하는 것 역시 너무나도 쉽다. 그러므로 종교가 탈속을 말할 때 그 탈속이 어느 세속의 토대 위에서 벌어지는 것인지, 종교가 맹목을 요구할 때 그 맹목이 어디를 향하게 될 것인지 항상 헤아리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Written by 이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