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마실래요?

술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무더운 여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샤워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를 저는 좋아합니다. 지인들과 신나게 떠들면서 기분좋게 마시는 소주 한 잔도 좋아합니다. 캐주얼한 웨스턴 바에서 바텐더와 다트 한 판 후 마시는 칵테일도 좋아합니다. 많은 재료가 필요하지 않은 진토닉 정도는 집에서 혼자 만들어 마십니다. 양주는 스트레이트로 먹긴 아직 한참 무리지만 토닉워터와 섞어 하이볼로 마시는 위스키도 나름 즐길만 하다는 걸 최근에 알았습니다. 양꼬치에 고량주라던가 연어에 사케라던가 비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 혹은 동동주.. 아직도 마셔야 할 술이 참 많습니다. 이렇게 무궁무진한 술의 세계에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포도주, 와인 입니다.

지난 5년간 와인업계에 있으면서 고객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확실히 예전보다 와인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와인은 꽤 많은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와인 한 잔 마시려면 그 역사 정도는 알아야 될 것 같고 어려운 이름을 줄줄 외워내야 하며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에서 연인과 함께 스테이크를 썰면서 — 한 입 먹고 입 닦고 한 입 마시고 입 닦고 그런 가당치도 않은 행동을 하면서 — 마셔야 하는 게 와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저는 참 많이 봤습니다.

술이 다 거기서 거기지 와인이라고 뭐 다를 게 있겠습니까. 영어니까 와인이지 그거 그냥 포도로 담근 술입니다. 과실주란 말이죠. 어머님들이 가을 되면 담그시는 매실주 복분자주 산사춘 그런 거랑 똑같은 겁니다. 와인을 마시는데 필요한 것은 단언컨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맥주의 역사니 소주의 유래니 그런 건 모르겠습니다만 먹다보면 나름의 맛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제깟 술이 뭘로 만들었든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요. 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인을 처음 마셔보는데 어떤 것이 좋은 와인이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은, 좋은 와인은 둘째치고 일단은 달콤한 맛부터 마셔보는 게 안전합니다. 와인의 맛은 꿀처럼 진득하고 단 맛부터 아주 텁텁하고 강한 맛까지 천차만별 입니다. 한 병에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아무리 좋은 와인이라고 해도, 마시는 사람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건 좋은 와인이 아닌 겁니다. 처음엔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이 상대적으로 마시기 편한데, 레드 와인은 포도의 껍질과 씨까지 한꺼번에 압착해서 담가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텁텁한 탄닌의 맛이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처음 와인을 마셨을 때 이런 강한 탄닌감을 가진 레드 와인을 드신 분들은 대부분 와인에 대한 인식이 꽤 나쁩니다. 맛도 없고 쓰고 시고 떫고 도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느냐고 말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저는 일부러 더 달콤한 와인을 추천하곤 합니다. 특히 연인과 함께 마실 예정이라면 더더욱, 마냥 달콤하고 병모양도 예쁘고 잔에 따라놓으면 몽글몽글 기포가 올라와서 더 예쁜, 이탈리아의 모스까또 다스티가 제격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스파클링 와인이고 상당히 맛있습니다. 알코올 함량도 낮고 약발포성이라 주로 식사 후에 과일이나 케이크 같은 디저트 류와 많이 마십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론 그냥 와인만 마셔도 맛있습니다. 기분 꿀꿀할 때 컴퓨터 앞에서 게임이나 만화책 보면서 마시면 더 맛있습니다.

저정도만 얘기해도 일행 중에 여자분들이 있으면 (연령대가 어릴수록 더, 또한 커플이면 200% 확률로) 거의 모스까또를 고릅니다. 달달한 화이트 와인부터 드시면서 와인에 대한 거부감이 좀 덜해지면, 이제 다른 와인이 궁금해지기 시작할 겁니다. 그럼 그때부터 슬슬 조금 덜 단 맛이 나는 쪽으로 천천히 넘어오시면 됩니다. 달콤한 스위트 와인부터 깔끔한 화이트 와인, 부드러운 레드 와인과 텁텁하고 묵직한 드라이 와인까지 폭넓게 마셔보면서 그 중에 정말 본인 입맛에 맞는 와인들을 찾아가는 것도 와인을 행복하게 즐기는 자세이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와인이라는 이 맛있는 술을 진심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고 경험했던 스펙트럼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잘라냅니다. 타인 혹은 사물 등 무언가에 호기심이 생깁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굳이 저기까지 가봐야 별 거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내 호기심을 푸는데 들인 수고와 노력과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손해를 보는 것에 지독히도 예민해지고 날을 세웁니다. 하다못해 고작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만든 와인 하나 고르는 것조차 그렇습니다. 안 먹어봤는데 별로 맛없을 거 같고, 애써 샀는데 맛이 없으면 무조건 손해고, 그렇기 때문에 여태까지 계속 먹어본 술을 마시는 게 마음 편하고, 결국 오늘도 에이 내가 무슨 와인씩이나 하며 와인은 다음으로 미뤄집니다.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 매일 경험해본 똑같은 것만 골라서 삽니다.

미지와의 조우라는 것은 이렇게 늘 다가오지도 않은 리스크부터 고민하게 합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이 결국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의 분위기라는 것을, 우리는 끝내 눈치채지 못합니다. 실패는 잘못된 것이며 손해를 본다는 건 멍청한 일이니까요. 별 것 아닌 술 하나 고르는 데에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실제로 제가 만나본 고객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와인을 고르러 올 때마다 첫마디로 ‘안 마셔본 것’,‘새로운 것’을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마셔봤어요?’, ‘맛없으면 환불해줘요?’를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전 할 말을 잠시 잃곤 합니다. 몇 번 겪어본 후에는 당연히 환불해드린다고, 대신 (손가락 한마디를 짚어 내밀며) 요만큼만 드시고 오셔야 한다고 능청스레 상대했습니다만.

 

적어도 와인을 고르는 순간만큼은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나 좋자고 사는 술인데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눈치를 봐야한다는 건가요. 와인은 뚜껑을 따기 전까진 절대 그 맛과 향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처음 코르크를 열자마자 마시는 첫 잔과 마지막 잔의 맛이 다릅니다. 아예 따르는 잔마다 시시각각 맛과 향이 변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득실을 따지는 것보다 그냥 즐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와인을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 맛있는 술을 마시는데 필요한 자세 같은 건 없다는 것이 제 지론이 되었죠. 사실 산다는 것도 비슷하지 않던가요. 사람이 자기 삶을 산다는데 정답이니 오답이니 그런게 어디 있겠습니까.

 

신기하게도 와인은 혼자 마실 때보다 여럿이 함께 마실 때가 더 맛있는 술입니다. 분위기를 탄다고 할까요. 기분이 우울하고 힘들 때 마시는 것보다 즐겁고 행복한 기분으로 마시는 게 훨씬 맛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레드 와인에는 붉은 육류를 안주로 먹고 화이트 와인에는 해산물 종류를 안주로 먹지만, 내가 먹고싶은 음식이 있으면 같이 먹으면 됩니다. 가족들과 집밥 먹으면서 반주로 마셔도 맛있고 TV 보면서 피자나 치킨 심지어 족발 보쌈 등에 먹어도 맛있습니다.

 

이번 명절에는 가족들과 함께 식사시간에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전보다 좀 더 즐거운 시간이 되겠죠. 그리고 사실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홀짝대고 있습니다. 한 잔 드실래요?

 

 

Written by 이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