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살펴 본 어떤 놀이문화 – 롤플레잉 게임, RPG, 혹은 역할놀이에 대한 소고

I. 롤플레잉(역할놀이)이란 무엇인가?

 

1. 당신이 아는 놀이문화?

 

우리 사회에서 이게 바로 어른들의‘놀이문화’라고 이야기 할만한 게 뭐가 있을까요? 한 번 곰곰이 생각을 해봅니다. 술? 도박? 아니면 마약? 아, 마약은 너무 나갔나요? 막상 떠오르는 게 이런 거 밖에 없네요. 아니면 클럽에 나가 음악에 몸을 맡긴다든지, 당구장에 간다든지, 노래방, 아니면 컴퓨터나 콘솔로 즐기는 게임 정도일까요? 독서나 음악감상? 그 밖에 또 뭐가 떠오르시나요?

그럼 눈길을 돌려 어린 시절로 살짝 되돌아가 보도록 합시다. 더러는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또 요즘은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움이 많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시골에서 자란 저는 어린 시절부터 온갖 놀이를 하고 살았습니다. 깡통차기, 비석치기, 사방놀이,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끝도 없겠군요.

어린 시절을 생각하다가 문득 2000년도 초반에 유행했던 보드게임 열풍도 떠오르네요. 블루오션이랍시고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보드게임 카페. 아마도 한 번쯤 경험해 보셨거나 아니면 오며가며 간판이라도 보신 적 있으시리라고 믿습니다. 사실 이건 어릴 때 우리들이 놀던 것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기물을 이용하느냐, 아니면 라이브 액션Live action을 하느냐의 차이 정도랄까요? 그렇게 보면 어릴 때 하고 놀던 공기놀이나 팽이치기, 아니면 장기나 바둑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겠지만요.

언젠가 ‘놀이문화’로써의 보드게임에 대해서도 다룰 날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오늘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비유하자면 보드게임의 사촌 쯤 된다고 할까요? 바로 롤플레잉 게임입니다.

 

2. 당신이 아는 롤플레잉 게임?

 

컴퓨터나 콘솔 게임을 딱히 좋아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한국 게임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흔히‘다중접속역할게임’이라고 부르는 MMORPG의 RPG가 바로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을 뜻 합니다. 굳이 우리말로 하면‘역할놀이’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롤플레잉 게임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가 머릿속을 번뜩 스칠지도 모릅니다. 하나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탱커(Tanker, 상대의 피해를 받아주는 역할), 딜러(Dealer,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역할), 힐러(Healer, 피해를 복구시켜주는 역할)의 구분과 이‘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롤플레잉입니다.『에버퀘스트』나『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 아니면『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등이 이런 공식을 정립하는데 일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선형적이거나 비선형적인 구조를 따라 미리 주어진 스토리나 퀘스트(Quest, 그러니까 일종에 해결해야하는 임무 같은 겁니다)를 완수하는 식의 롤플레잉 게임, 이를테면『엘더스크롤』이나『위처』시리즈, 아니면 조금 더 고전을 파고들자면『울티마』나『드래곤퀘스트』같은 게임을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걸‘역할놀이’로 정의하는 건 어쩌면 좀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먼저 전자의 경우처럼 단지‘포지션’을 나누어서 협력하는 걸 역할놀이라고 해버리면, 물론 이건 비약입니다만 축구나 농구도 여기서 정의하는‘롤플레잉’이 되어 버립니다. 후자의 경우 역시 스토리가 선형적이든 아니든, 방식이 액션이든, 뭐든 간에 미리 주어진 문제가 있고, 그 해답을 찾는다는 점에서 일종의‘퍼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걸 엄밀한 의미에서‘역할놀이’라고 말하기엔 좀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의미를 한정하거나, 아니면 조금 더 엄밀한 의미에서 그럼 역할놀이가 무엇인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3. 우리가 이미 아는 바로 그 롤플레잉?

 

어쩌면 다소 말장난같이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롤플레잉 게임, 혹은 역할놀이란‘참여자’가‘주어진 환경’에 맞추어‘특정한 인물’의 역을 맞는 것을 말합니다. 간단하게‘역할’이라고 말하니 위에서 언급한‘포지션’과 겹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인물’을 연기하는 쪽에 더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이전부터 워게임 형태의 역할놀이 비스 무리한 것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인류 역사에서 ‘상품’으로서 모양새를 갖추고 등장한 최초의‘역할게임’은 1974년에 게리 가이각스Gary Gygax가 만든 『던전스 앤 드래곤즈Dungeons & Dragons』초판입니다. 서구에서는『던전스 앤 드래곤즈』의 기념비적인 등장 이전에도 시간을 거슬러 16세기 무렵에 성행한 순회‘즉흥극’의 형태에서 이러한 원형이 있었다고 말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골똘히 고민해보니 이는 서구적인 특징만도 아니고, 또 어쩌면 보다 인류의 원형적인 형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방금 함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려 봤습니다. 아마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각자 서로 약간 다른 이름과 방식으로 온갖 놀이를 즐겼었던 그 때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훨씬 어렸을 때, 아니면 나이가 들고 나서도 이렇게‘규칙’을 따르며 즐겼던 놀이와 함께 해오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역할놀이’입니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언젠가 소꿉놀이나 전쟁놀이를 하거나, 인형이나 장난감 따위를 만지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전자가 사회의 모방이었다면, 후자는 상상의 날개를 펴고 세상의 인식을 확장하는 행위였을 겁니다.

아마도 제 인류학적 견문이 짧은 탓에 이미 다 밝혀진 이야기를 거창하게 떠들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렇게 놀았던 아이들이 20세기에 처음 나온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의 경제활동이 수렵채집에서 농경사회로 옮겨지고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후에 아이들은 계속 역할극을 하며 놀았을 거라는 상상을 살며시 해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RPG는 하위문화이며, 너드Nerd들의 전유물일거라는 편견은 뒤집어 말해, 어른이 된 이후에 당신이 잃을 것을 강요당한 상상의 원형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 다시 롤플레잉!

 

그런 의미에서『던전스 앤 드래곤즈』의 등장 이후로 점점 정교하게 발전하고 있는 ‘롤플레잉 게임’은 형태만 놓고 보면 세상천지에 없던 무언가가 어느 날 뚝딱하고 나온 게 아닙니다. 정말 무성의하게 이야기하자면, 어린 시절 해오던 놀이들처럼,‘역할놀이’에 일종의‘규칙’을 부여한 게 전부이기 때문이지요.

『던전스 앤 드래곤즈』이후에 등장한‘롤플레잉 게임의 특징이란 놀이에 참가하는‘참가자’이외에도‘룰북’과 이를 바탕으로 한 판정 수단인‘주사위(요즘은 없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와 일종의‘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앞서 말한‘규칙’이 있는 셈이지요. 이것이 이전의‘역할놀이’와 구분하는 준거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를테면“내가 더 쎄단 말이야.”하고 우기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단 모든 행위는‘룰북’이 담고 있는 세계의 물리법칙을 따릅니다. 예를 들면 게임에서 캐릭터인 A를 향해 날아오고 있는 화살이 그의 가슴에 꽂힐지 아니면 운 좋게 피할 수 있을지는‘룰북’이 부여한 게임 내의 물리법칙의 영향을 받습니다. 만일 판정에 실패하면 캐릭터인 A가 목소리를 높여도, A를 움직이는 게임 참가자인 B가 떼를 써도 화살은 영락없이 A의 가슴에 박히고 피분수를 뿜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주사위나 숫자놀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참가자들이 자신이 만든‘인물’을, 각자가 부여한‘성격’에 따라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인다는데 이 놀이의 궁극적인 재미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사실 앞서 말한 게임 내의 물리법칙이란 이를 위한‘보다 사실에 가까운’어떤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에 체험한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흔히 이런 게임을 탁자Table에 둘러앉아 말Talk로 하는 역할놀이Role Playing Game, 줄여서 TRPG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이 말은 컴퓨터나 콘솔용 게임기에서 즐기는 1인용 롤플레잉 게임(CRPG)과 구분 짓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현대적인 놀이문화로서의 ‘역할놀이’를 칭할 때면 별 다른 수사 없이“롤플레잉 게임”, 더 줄여서 “RPG”라고 부르고 있으니까요.

 

5. 마치며

 

앞서 말한 대로 이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어떤 원형에 가까운 욕망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만화, 소설, 연극, 영화 등‘이야기’양식을 발달시켰습니다. 하지만 ‘재연’을 보거나, 듣거나, 읽는 우리는 어디까지나 관객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컴퓨터나 콘솔 게임기 등을 통해‘게임’을 즐기고 있을 때조차도 우리는 기껏 해봐야 약간의‘퍼즐’을 풀고 있는 관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할놀이는 주어진 규칙을 통해 참여자 개개인이 캐릭터를 움직여 다른 삶, 다른 경험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습니다. 참여자 개개인이 의미 있는 경험을 하는‘관객’인 동시에‘행위주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놀이문화로서는 참 독특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이유로 국내의 롤플레잉 마니아들은 이를‘즉흥극’의 일종이며,‘예술’의 영역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합니다만, 그런 숭상과는 별개로 저는 그저 이것이 우리가 어린 시절에 한번쯤 즐겼을 법한 것들의 보다 세련된 판본이라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여가와 놀이의 빈곤을 호소하는 요즘이기 때문에 더욱 더, 몰라서 그렇지 사실 우리는 이미 많은 대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살며시 속삭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Written by 박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