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저씨에게 응답하라

1월 4일, 2016년 새해 첫 출근날이었다. 연휴가 끝나서 아쉬운 마음과 푹 쉬어서 유쾌한 마음이 반반 섞여서 출근하니, 이사가 직원들에게 인사 카드를 작성해서 제출하라고 했단다. ‘회사에서 갖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서류’라나? 다들 입사 직후에 이력서를 제출한 걸로 아는데, 그걸 인사 카드 삼으면 될 텐데 뭐하러 새로 작성하라고 하지? 인사 카드를 작성하려면 기존에 제출했던 그 이력서를 찾아 봐야 할 판이라 귀찮았지만, 일단 작성하라는 인사 카드의 양식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첫 번째 이미지를 보면 알겠지만 절반 이상이 쓸데없는 항목이다. 본적은 챙겨 본 게 언젠지 기억도 안 나고, 호주제 폐지된 지가 언젠데 호주 타령이며, 회사에서 직원의 주민등록상 주소는 알아서 어디에 쓰겠는가? 게다가 키, 몸무게, 집 소유 여부, 생활 수준 등등…이게 2010년대 회사의 인사 카드인지 1970년대 호구 조사서인지 헷갈렸다. (군필자가 아니어서 해당 사항은 없었지만 ‘군번’ 항목까지 보고는 그냥 웃었다.) 뿐만 아니라 재학했던 학교의 소재지에, 가족의 직업, 학력을 쓰라는 칸도 있었다. 덕분에 새해 첫 출근날부터 열이 꼭뒤까지 올랐다.

 

직원에 대한 정보 중 회사에서 알아 두어야 하는 것도 있을 거다. 경력이나 자격증 같은 건 그 직원의 직급이나 연봉, 담당 업무 같은 걸 정할 때 필요하겠지. 다들 이력서를 내긴 했지만 회사가 커질 경우도 대비하려면 통일된 양식의 문서로 관리하는 편이 좋을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회사에서 직원 가족의 학력이나 직업을 알아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러면서도 정작 필요할 것 같은 항목은 부족하거나 없다. 가령 면허, 자격을 쓰는 칸은 3칸뿐이라 4개 이상인 사람은 해당 사항을 기재하기 불편하다. 또 직원이 결근했는데 연락도 되지 않을 경우 활용할 비상 연락망을 쓰는 칸도 없다. 이런 인사 카드를 대체 왜 써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서?

 

인사 카드에 불만인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분도 이런 걸 왜 쓰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자기는 아예 필요 없는 부분은 안 쓰겠다고 말해 두었단다. 그러면서 귀띔해 주길, 이사가 저 카드 양식을 만들 때 재밌다고 낄낄대더란다. 그런 얘길 듣고 나니 이딴 걸 만들고서 뿌듯해할 이사에게 항의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난 두 번째 이미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 항목에는 그 이유를 적어 항의하는 방식을 택했다. (모자이크 처리한 부분은 회사에서 관리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되어서 적은 사항이다.) 이미지를 보면 원래 양식과 달리 자격증 칸을 4개로 바뀌어 있는데, 저렇게 문서 양식을 바꾸면 관리하기 불편할까 봐 기존 양식의 문서를 출력하고 저 내용을 베껴 적은 뒤에 제출했다. 불만이 많긴 했지만 내 나름대로 인사 카드의 취지는 존중하려고 한 것이다.

내 딴에는 양보한 결과물이었으나, 이사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사는 직속 직원에게 지시해서 내게 인사 카드를 다시 쓸 것을 요구했고, 직속 직원은 이렇게 쓰는 거 아니라면서 해당 사항이 없는 부분은 그냥 비워 놓으란다. 그 직원이 최대한 좋게 말하려고 애쓰는 것이 느껴졌지만 (사소하다면 사소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모르긴 해도 불쾌했을 것이다.) 새삼 화가 치밀었다. 안 쓰고 넘기면 그만인 걸 몰라서 저렇게 쓴 줄 아나? 불필요한 항목을 넣은 게 잘못이라고 지적한 거잖아. 그래서 그 직원에게는 미안했지만 짐짓 세게 나갔다. 난 저기서 더는 손 안 댈 거니까 화이트칠을 하든 어쩌든 마음대로 하라고.

그런 뒤에는 별 말이 없기에 이사가 날 괘씸하게 생각하면서 직속 직원에게 화이트칠을 하라고 시켰나 보다 했다. 그런데 이틀쯤 지나서 직속 직원이 새로운 양식의 인사 카드를 보냈다. 그걸 보니 다른 직원도 새 양식의 인사 카드를 다시 작성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랬다면 나 때문에 사람들이 한 번 더 귀찮은 일을 하게 된 거니까. 그래서 인사 카드 내용에 불만을 드러냈던 분에게 물으니, 그분은 새로운 양식의 인사 카드는 금시초문이란다. 이쯤 되자 이사가 새 인사 카드를 만들려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변경된 양식의 카드마저 작성을 거부하면 직속 직원이 정말 난처해질 것 같아서 적당히 써 주었다.

 

올해 우리 회사에서 내세운 목표 중 하나가 동호회 같은 성격을 버리고 회사다운 회사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이사가 ‘회사에서 갖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서류’랍시고 저렇게 이상한 걸 써 내라고 한 것도 그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사다운 회사라면 관리해야 할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를 분별하려는 노력부터 할 것이다. 반면 이사가 요구한 인사 카드는 회사다운 회사에 대한 이사의 환상을 주먹구구식으로 충족하려던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나는 그런 불합리한 요구에는 장단 맞춰 줄 생각이 없다. 이게 내가 개저씨에게 응답하는 방법이다.

Written by 阿無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