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문 – 이것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지상명령이다

무릇 올바름을 지키고, 떳떳함을 아는 것을 도리라 하고, 위태로움에 임하여 대응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로운 자는 이치에 순응하여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르고 함부로 행하다 패망하게 된다. 사람이 사는 동안 생사는 기약하기 어렵고, 만사는 마음에 달렸으니 옳고 그름은 가히 분별할 수 있다.(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 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이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1135년 전인 881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황소의 난을 격퇴하기 위해 당시 토벌총사령관 고변의 휘하에 종군하던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의 서두이다. 이 글은 과연 격문(檄文)이란 이름답게 회유와 협박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익히 잘 알려진 대로 황소는 이 격문을 읽다 자기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왔다느니, 자기도 모르게 글을 읽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느니 하는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서두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연유는 작년 말에 자행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외교적 담합에 대해 미력하나마 격문의 형태를 빌려 읍소하기 위함이다. 다만 식견이 궁색하고 견문이 일천하여 익히 고금에 남은 명문의 힘을 조금이나마 빌리려 할 뿐이다.

지난 12월 18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한일외교장관회담의 합의문이 발표되었다. 일본 정부는 한일 외교장관 회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며,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가 명백히 국가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전쟁범죄임을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역사의식 재고 등 반성에 관한 모든 조치를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총리인 아베 신조가 직접 사과문을 발표하거나 낭독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한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여 소녀상의 철거 및 이전 등을 요구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시는 거론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이들의 합의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 말했다. 이러한 점에 미루어 위에 언급한 책임의 통감이나 마음으로 부터의 사죄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다고 볼 수도 없고, 양국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 있는 사과를 기대한 많은 이들의 기대를 이번 ‘외교적 담합’으로 철저히 저버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문제도 아니며 그렇기에 또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혹자는 민족의 짓밟힌 딸들에 분노하고, 혹자는 올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하여, 또 누군가는 인권의 문제로, 또 누군가는 제국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이고 국가적인 전쟁범죄이기에 분노하고 있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이견의 여지가 없는 듯하지만, 아쉽게도 여러 감수성이 존재하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세상인지라―비록 자신들은 관점의 차이라 해도, 보고 듣는 이들에게는 혐오발언인자라―이 문제 자체에 대한 갑론을박이 존재한다. 우선 인두겁의 탈을 쓰고 증오언설을 쏟아내는 이들에 대해서는 부족한 지면을 낭비하는 것도 부족괘치(不足掛齒)하기에 길게 언급할 까닭이 없다 하겠다. 사람은 본시 사무사 무불경(思無邪 毋不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자신의 딸이 당한 일이라 해도 괘념치 않겠다는 말은 배은심 여사나 이소선 여사 같은 부모들이 느끼는 그 심정이 유별나고 특이한 것이라 호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부류들은 차치하더라도 오히려 진보일각에서 거론되는 언설들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 이야기 해볼까 한다.

작금의 위안부 문제는 어떤 형태든 민족의 문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부인하지도 않겠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에 대해 적대적인 분들의 경우 ‘민족주의’에 적대적이기에 같은 담론 하에 거론되는 이 지점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분들이 있다. ‘민족’으로 화자 되는 언사들의 문제점을 다 쓰기에는 허락된 지면이 모자를 지경이니 생략하더라도, 또한 이들이 어떤 점을 경계하는지는 심정적으로 이해하지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파생하는 문제와 민족주의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에 어떤 식으로든 작용한다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그 할머니들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거나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거론되는 방식이 문제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있겠지만 핵심을 보지 않고 변죽을 울리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또한 이와 비슷한 지점에서 모두가 감상적이고 감정적이 되는 것을 경계하며 평소 내 주변의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들이 갑자기 대두되는―또한 예전부터 산재하던 이 문제에 지금껏 아무런 관심도 없던 많은 사람들이―위안부 문제에 갑자기 들끓어 오르는 것에 불편함을 표하는 분들이 있다. 분명 필자도 여기에는 자유롭지 못하며 이에 괴천작인(愧天怍人)할 뿐이다. 다만 어떤 유행이나 패션처럼 분노를 표방하는 것을 경계하며 꾸짖는 것을 넘어 나는 그 할머니들의 문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또한 그들의 우려와 경계함이 어떠한지는 충분히 고려해 봄직하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문제가 일본 제국주의라는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구조적인 전쟁범죄이자 또한 버젓이 피해 당사자들이 여전히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한다. 이 문제가 너의 일상에서의 차별이나 부당함과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 것은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발로이겠으나 역시 그런 말들로 인해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을 조금만 곱씹어 보자면 계속해서 현안처럼 쌓이는 그 많은 투쟁과 연대들에 대해 왜 당사자도 아닌 외부인이 참견이냐는 보수 일각의 주장과 너무나도 결을 같이 하고 있으며, 뉴라이트 등을 지지하는 자라면 더 이상 거론의 여지가 없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그들과 얼마나 다르지 않은지도 새삼 경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문제제기와 필설로 다 표현 못한 경계함은 분명히 유의미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가 쉽게 분노할 수 있는 이러한 사안에도 분노하지 못하는 자들이 내 주변의 불평등에 맞서 저항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필자는 아니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타인의 인권에 둔감한 사람이 어떻게 나의 인권은 옹호해 달라고 감히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양 ‘인권’을 필승의 보검처럼 휘두르지 않더라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계속해서 지적한 것처럼 엄연한 전쟁범죄이다.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일본의 욱일승천기는 둘 다 대표적인 2차대전 전쟁범죄의 상징이다. 이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유대인 학살 등이 응당 문제라면 일본 제국주의가 행한 무수한 전쟁범죄 중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와 똑같은 무게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쟁범죄는 용납하기도 힘든 일이고 용납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에 저항하고 이를 고발하는 상징 중에는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서 건립한 평화비가 있다. 요즘 어버이 연합 분들이 자주 방문하고 있고, 일본 정부 측에서 철거 및 이전을 요구하는 소녀상이 바로 그것이다. 경우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독일정부가 자신들의 안녕과 위엄을 위해 각지에 설치된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철거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선언했다고 해보자. 아마 국제사회는 충격에 휩싸일지도 모른다. 그전에 자국의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우리는 일본정부가 요구하고 한국정부가 철거해 드리겠다고 한 것이고, 소녀상 또한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한국정부가 발 벗고 나서 건립한 것이 아니라 이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세운 것이니 이미 완전히 다른 문제일지도 모른다. 혹시 노파심에 말하자면 지금 이 말은 완전한 반어법이자 이런 요구 자체가 이미 언어도단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모든 이들이 너를 죽이려 생각하고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모두 죽일 궁리를 논하고 있다. (不惟天下之人 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 已議陰誅)

 

서두에 언급한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에서는 위와 같은 문장으로 황소를 협박하고 있다. 천년이 지난 지금 저 문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저주의 말인지 체감할 길이 없으나 저렇듯 고대의 무시무시한 문장이 아니더라도 이 격문으로나마 한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굳이 역사의 수레바퀴까지 운운하진 않겠다. 다만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졸속적인 외교 야합은 적법하지도 않을 뿐더러 양국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이와 뜻을 같이 하는 제 단체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여 이를 즉각적으로 반영하고 시행해야 할 것이다.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든 것에 대해 심심한 유감을 표하며 이를 거부하고 무시함으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의 책임은 양국에 있음을 분명히 천명한다. 이것은 단순한 으름장이나 협박이 아니다. 이것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지상명령이다.

 

 

Written by 박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