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에 직장이 있단는 건

제가 번아웃과 조울증이 극도로 악화되어 직장을 그만둔 게 작년 11월, 반 년 동안 푹 쉬고 다시 취업을 하게 된 게 올 4월 중순입니다. 지인 소개로 들어오게 된 회사는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투자를 하는 회사입니다. 사무실 위치는 역삼역에서 도보 3분, 테헤란로 한가운데죠. 강남, 역삼, 선릉, 삼성동까지 포괄하고 있는 테헤란로는 직장인, 사업자를 막론하고 일하는 사람의 인구를 세어보면 한국에서 제일 포화도가 심한 곳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제가 취업을 하기 직전에 운전면허를 따서 차를 사려고 한참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근데 주변 모든 사람, 심지어 중고차 딜러님까지도 자가용 강남 출퇴근을 만류했습니다. 강남에서 운전하는 것이 진짜 힘들어서 초보는 사고를 내기도 십상이고 차를 가져가는 것이 오히려 출퇴근 시간도 오래 걸리고 월 주차비도 비싸고.. 굉장히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입사하자 마자 일이 너무 바빠서 체력을 확 잃어버린 뒤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힘조차 없었던 저는 5월~6월에는 택시로 출퇴근을 하는 일이 꽤 많았는데요. 회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40분이 걸리고, 차가 막히지 않을 때 자가용을 이용하면 25분이면 갈 거리를 택시를 타면 늘 출근시간이 1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비라도 오는 날에는 1시간 20분도 걸려서 회사에 늘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를 연발해야 했었죠.

출퇴근할 때마다 들었던 생각은 왜 회사는 하필 역삼에 있을까?’ 였습니다.

 

밥 한 끼에 9천원은 우습게 들어가고 건물 임대료도 장난이 아닌 이곳에 회사가 굳이 자리를 잡은 이유는 투자자들이 찾아오기 좋아서 인듯 합니다. 투자자들 뿐만 아니라 회사의 업무에 필요한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기에 강남만한 곳이 없다는 이유인데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테헤란로 일대는 자가용은 자가용대로 차가 많이 막히는 데다가 주차공간이 적지 않지만 그에 비해 수용해야 하는 차량이 훨씬 많아 주차공간도 정말 모자라고, 대중교통은 대중교통대로 올 때까지 콩나물 시루 꼴을 피할 수 없는 데다가 버스를 타면 자가용보다 훨씬 더 시간이 소요돼서 교통편은 그야말로 최악인데 말이죠. 밥값 비싸, 임대료 비싸, 교통편 최악이야. 어떤 거를 생각해봐도 다른 지역보다 나은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 왜 사람들은 강남, 그것도 테헤란로에 굳이 몰려드는 걸까요?

 

답은 의외로 간단하죠. 다들 몰려드니까 몰려오는 거죠.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인프라가 확충되고,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미팅도 강남에서 잡는 게 훨씬 나은 상황이 되고,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공유오피스도 계속 생기고. 수요가 미친 듯이 생기니까 자영업자들도 몰려들죠. 하지만 강남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으니 임대료는 타 지역대비 터무니 없이 비싸고, 그러다 보니 임대료를 충당하기 위해 밥값이 비싸지고, 그런 밥을 직장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사 먹고. 여러모로 악순환입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지방이 집값이 싼 것을 알면서도 갈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회사는 서울, 특히 강남에 몰려 있으니 말이죠.

 

한편 지방에 양질의 일자리가 생기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다 서울, 아니면서울에 출퇴근 하기 좋은 수도권 지역에 몰려 있는데 서울 바깥에 사무실을 둔다는 건 직원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지니까요.

정말 큰 기업이 마음 먹고 결정을 하더라도 ‘회사 따라 이사를 가느니 그냥 직장을 그만두겠다’ 하는 경우도 많죠. 네오플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던전 앤 파이터를 만든 팀으로 잘 알려진 네오플은 제주도에서 조세감면혜택을 받기 위해 사옥을 제주도로 옮겼는데요, 이에 따른 반발이 상당했습니다. 네오플은 회사를 옮기면서 직원들에게 파격적인 복지를 약속했지만 이 당시에 제주도로 생활권을 옮길 수 없어서 퇴사한 노동자들도 꽤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렇게 규모가 큰, 중소기업보다는 업무환경이 좋을 가능성이 큰 회사조차도 서울 외 지역에 자리를 잡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일반 기업이 지역에 회사를 잡는 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어떤 것이 선행돼야 할지 많은 고민이 들지만 우선 일자리를 지방으로 좀 흩어 놓으면 그 일대로 생활권이 형성되면서 노동인구 과밀화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듭니다. 코로나19로 인해 화상회의가 발달되기도 했으니 이제 미팅이 굳이 직접 면대면으로 이뤄질 필요성이 많이 줄게 됐고 실제로 그런 문화도 많이 전파되고 있기도 하죠.

 

그런 면에서 예를 들면 판교 같은 지역을 지방에 만들고 그곳이 예전 세종시처럼 일만 하고 돌아가는 도시가 아닌 생활권으로써 기능하기 위해 다양한 인프라와 그에 맞물린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하게끔 하는 겁니다. 이미 2차 산업 관련 사업체는 대부분 이런 지방에 있으니 3차 산업 관련 사업체를 분야별로 나눠서 도시별로 흩어 놓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죠. 이렇게 되면 적어도 ‘사람이 몰리기 때문에 땅값이 더 비싸진’ 강남 3구의 집값도 낮추고 인구 과밀화도 해결해볼 수 있겠죠. 그 다음엔 강남3구의 집값이 내려가거나 혹은 실수요자들은 많이 빠지고 진짜 투기자본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앞의 두 경우 중 어떤 쪽이 됐건 적어도 지금보단 강남3구의 집값을 해결하기는 좋아질 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도시계획이나 부동산 대책에 대해 세세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했을까요.

 

하지만 이런 날은 아득해 보입니다. 가면 갈수록 강남, 특히 테헤란로에 회사들은 몰려들고 강남3구 집값이 미쳐 날뛰다 못해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살아보려고 광진구, 강동구, 동작구는 물론이고 서울 전역 집값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물론 집값 상승은 전국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지금 서울, 특히 강남3구의 집값은 비싸도 너무 비쌉니다.

 

내 노력만으로 집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이 돼야 할까요? 집값 안정화? 비수도권 생활권 구축? 그도 아니면 다른 정말 좋은 정책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라도 할까요? 하지만 그 어떤 방안이 와도 적어도 지금 서울에서는 실행되기엔 요원해 보입니다. 저는 오늘도 양평의 단독주택 가격을 알아보고 강남권 자가용 출퇴근 시간과 비용을 계산해봅니다.

 

 

Written by 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