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 오면, 영화 <안경>을 봐야 합니다

*이 글은 영화 <안경>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안경>을 처음 보았던 때는 작년 여름, 근처 영화관에서 여름 영화 특선 어쩌구를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워터 릴리스>를 본 다음 바로 <안경>을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짰었더랬지. 하지만 주말 아침 9시에 일어나 연달아 두 편의 영화를 보는 건, 경기 외곽에서 서울까지 주 5일 출퇴근을 반복하는 직장인에게는 역시 무리였던 걸까. 안 그래도 잔잔하기로 소문난 영화인데(포스터에 써 있는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라는 저 문구를 보라!) 몇 시간 뒤의 체력까지 끌어다 써버렸으니. 나는 그만 마스크를 낀 채 쿨쿨 잠들고 말았다.

하필 시기가 시기인지라 나를 보고 놀란 직원분이 깨워주셨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영화관에서 깜빡깜빡 잠든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곯아떨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 뒤엔 약간 내 흑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영화란 기분이 들어 다시 보는 일을 피했다. 이상하지요? 저도 이런 제가 이상하고 특이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그런 부분이 하나쯤은 있잖아요.

그러다가 지난 주말, 왓챠플레이에서 하염없이 이런저런 목록들을 구경하다 <안경>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 내 사전에 보다 만 영화는 없을지어다. 그렇게 나는 마침내 <안경>을 집에서 다 보았다. 마스크를 끼지 않은 채, 중간에 잠드는 일도 없이.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담백하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을 찾아서 이 섬으로 온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 역)’에게 뭐든지 권하지만, ‘타에코’가 거절하면 “그래요? 그럼…”이라는 한마디로 끝내버리는 민박집 ‘하마다’의 주인 ‘유지(미츠이시 켄 역)’라든가, 봄이 되면 이렇다 할 전언 없이 훌쩍 나타났다가 여름이 되면 또 가타부타 말 얹지 않고 훌쩍 떠나버리는 ‘사쿠라 씨(모타이 마사코 역)’라든가.

재미있게도 이 영화 속에서 담백하지 않은 사람이 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인공 ‘타에코’와 이 섬의 고등학교 생물 선생님 ‘하루나(이치카와 미카코 역)’다. 하지만 담백하지 않아도 이 둘의 결은 참 다르다. ‘타에코’는 처음에는 지나치게 사람들에게 가시를 세우고 있다. 그래서 까칠하게 느껴지는데, 어쩔 땐 그게 지나쳐서 눈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내가 ‘타에코’랑 다른 타입이라서 그런 걸까? 여행지에서 먼저 살갑게 다가가는 사람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 스몰 토크를 나누는 사람이라서? 여하튼 영화를 보다가도 ‘타에코’의 반응 때문에 괜히 섬사람들에게 이입하여 무안해져 “아니 꼭 저렇게 말해야 하나? 아니 꼭 저렇게 반응해야 하나?” 하고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그에 비하면 ‘하루나’는 그냥 조금 직설적인 사람이지. 어쩌면 ‘타에코’는 섬사람이 아니지만 ‘하루나’는 섬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타에코’는 점점 마음을 열며 이 섬에 익숙해져간다. ‘사쿠라 씨’나 ‘유지’가 권하는 일에 잘 끼어들고, 이 섬의 주특기인 사색하기도 즐길 수 있게 되고, ‘하루나’와 티격태격 말 주고받기도 잘하게 된다. 이 영화의 중심인물들은 하나같이 안경을 쓰고 있는데(그것 참 제목에 충실하기도 하지), 안경을 쓰고 있는 ‘타에코’는 물론이고 ‘타에코’를 찾아 불쑥 섬으로 찾아온 편집자 ‘요모기(카세 료 역)’ 역시 안경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역시 이 섬의 정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나저나 이 ‘요모기’를 연기한 카세 료 말인데요. 저는 처음에 카세 료의 얼굴을 잘 몰라서 저 잘생긴 남자 배우는 누군가 했답니다. 나중에 검색하고 나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카세 료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음을…… 심지어 다시 검색하기 전까지는 카세 료가 아니라 사카구치 켄타로라고 기억하고 있었음을……)

이 ‘요모기’는 ‘사쿠라 씨’가 그랬듯이 갑자기 섬에 나타났다가 후루룩, 섬을 떠나버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는 전혀 아쉬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근래에 이 섬에 또 올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반드시.

그건 ‘타에코’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않았답니다. ‘요모기’와는 완전 다르게. 특히 이 마지막 장면에서 ‘타에코’는 결코 다시 이 섬에 오지 않고 “그래, 그런 섬에 갔던 적이 있었더랬지……”라는 기억만 가진 채 도시에서 영원히 살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왜냐면 이 섬에 소속된 사람의 ‘증거’였던 안경을 ‘타에코’가 섬을 떠나는 날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섬이 ‘타에코’에게 있어서 유토피아나 마찬가지인 장소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이런 류의 영화가 늘 그렇듯이! 내가 너무 심오하게 읽었나 보다! 사실 ‘타에코’가 이 섬에 돌아오지 않고 그냥 끝났으면 더 좋았겠지 하는 생각은 했는데 뭐 영화는 감독 마음대로니까요.

그나저나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이 영화를 여름 영화로 분류하고 있는데, 막상 보니 여름 영화가 아니라 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야 바다도 많이 나오고 다들 반팔을 입고 있고 해서 까먹을 수도 있겠지만 이쪽은 남쪽(촬영을 오키나와에서 했다고 하네요)에 있으니 봄에도 다른 지역들보다 더울 테고. 중요한 기점이 되는 ‘사쿠라 씨’의 빙수 가게는 오로지 봄에만 열고, 여름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여름비가 내리면 문을 닫으니까요. 이것은 ‘사쿠라 씨’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지요. 사쿠라(櫻, さくら), 벚꽃이잖아요. 벚꽃은 봄에 피고 여름이 오기 전에 지니까, <안경>은 벚꽃을 즐기듯이 지금 봐야 하는 영화랍니다.

아아, 그나저나 정말로 남쪽 섬에 여행을 가고 싶다. 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영화 <안경>에서 내내 강조하는 사색하기, 그거 진짜 잘할 수 있는데. 누구보다 잘할 자신 있는데.

 

 

Written by 박복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