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우리의 위험한 민주주의

작년 연말, 우리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신간 2권이 나왔습니다.

<능력주의와 불평등>(박권일 외 9명 공저),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마이클 센델 저)는 각각 한국·미국 인사들이 쓴 책으로, 두 권 다 ‘능력주의’에 대한 관점과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회적·문화적으로 다른 기반이 있을 것 같은 두 나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능력주의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전에 ‘능력주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가늠이 안 온다는 분들부터 무슨 의미인지 대략 알고 있다는 분까지 다양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의미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긍정적인 뉘앙스는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과연 이건 부정적인 뜻을 가진 단어일까요?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능력주의는 영단어 Meritocracy를 번역한 것으로, 뒤에 붙는 ‘-cracy’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Democracy와 같이 정치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실력주의, 능력 정치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을 기반으로 권력을 획득할 수 있는 체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반박할 수 없는 ‘능력’이라는 가치가 최우선이라는 것인데, 위의 작가들은 이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여러분은 어떤 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무엇을 잘해야 능력이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은 바로 대답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각자의 기준으로 능력에 대한 정의와 의견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능력주의에 대한 고찰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중요시되는 실력이라는 것이, 주관적이라는 사실을요.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것에서 많은 논쟁거리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도요. 그래서 이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진지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위의 두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바로 입시 사회·학벌주의입니다.

 

해당 문제에 대해 자세한 말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노력과 성취를 통해서 발전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이에서 오는 행복도 매우 의미가 있고요. 다만, 저는 그것에만 매몰된 사회 자체에 대해 초점을 두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국내외 사람들이 많이 분노하는 것은 입시 비리일 것입니다. 국내에선 권력자에 의한 부정입학 사례가 나와 처벌받은 사례가 있었고, 미국에선 돈을 받고 학생들 브로커를 자처한 이도 있으며, 일본에선 유명한 의과대학이 여성·3수생에 대한 점수조작이 드러나자 ‘여성은 출산 등으로 의료 현장을 떠날 수 있다’며 논란만 야기한 해명을 남긴 적도 있었죠. 우리는 이처럼 명확한 부정에는 쉽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잘못되었고 시정해야 할 일이니까요. 절차적 정당성 없이 누군가의 입학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과연 그 절차적 과정에 하자가 없다면요? 그러면 우리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강남·분당 등 소위 8학군으로 불리는 곳과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SKY 및 경쟁률 높은 대학에 진학하는 확률이 높습니다. 많은 통계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데요. 그 배경에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즉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보를 얻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경제적 상황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연중에 배우는 ‘개인의 힘으로 성공’했다는 말의 어폐를 찌른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개인의 노력을 많이 들였을수록, 자신의 힘으로 성공했다는 의식이 강한 것이 현실입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은 고용형태인 비정규직이 언젠가부터 마치 노력하지 않은 대가처럼 취급되고 있지요. 많은 이들이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소위 ‘인국공 사건’)와 공공성에 대한 얇은 논쟁으로 제대로 매듭지지 않은 정부-의료계 갈등도 ‘노력으로 성공했으므로 대우받을 만하다’는 의식이 조금이나마 있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넘쳐나는 유튜브 영상 또한 이러한 현상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배경 없이’ 성공했다는 유튜버들의 이야기는 은연중에 ‘부족함’의 많은 부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있지요. 그렇기에 실제로 부족한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느끼게 됩니다. 다재다능한 그들의 모습. 그들은 ‘이렇게 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권장하고, 실패의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가게 합니다. 코로나19 같이 타의적 상황에 의해 실직된 사람들에게도 개인의 노력을 통해 극복해나가길 바라는 모습은 이에 대한 연장선상이라 보입니다.

 

이에 파생된 현상은 최근 미국에서 더 흥미롭게 나타났습니다. 미국은 대선을 전후로 정치적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코로나19 최대 감염국가라는 오명과 대통령의 의료시스템에 대한 불不신뢰, 의료의 정치화, 대선 불복과 국회의사당 난입 및 전임 대통령 탄핵안 검토까지…. 대통령 암살 및 사임 등 잔잔한 정치사와는 거리가 먼 미국이지만, 제도권 정치가 전면적으로 혼란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은 처음인 듯싶습니다.

 

그런 혼란의 중심에서 갈등상황을 주도적으로 만드는 인물은 바로 트럼프 전 대통령입니다. 어찌 보면, 그가 주도적으로 갈등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민자를 적대하고 자국 우선주의를 천명하는 등, 그가 내세웠던 가치들은 능력을 기반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공정성을 기반으로 경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던 주류 정치 과정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습니다. 그는 기존 정치인이 조금이나마 신경 썼던 이 논리성을 넘어간 채 유권자를 설득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비록 연임에는 실패했지만 대중영합주의Populism 확산에는 성공했습니다. 미국 선거의 특수성으로 적은 득표에도 당선이 되었지만, 2번째 대선에서는 무려 1,100여 표를 더 얻게 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마이클 센델은 이러한 현상을 능력주의에 대한 반란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능력이라는 가치를 평가하고, 사람들에게 불안과 좌절을 안겨주었던 기존 엘리트에 대한 반발심이 포퓰리스트로의 단결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센델과 저 둘 다 이런 포퓰리즘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러한 반란을 야기했던 기존 세력 또한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트럼프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공정성을 말했던 언론·경제계는 물론이고 우리 자신들 또한 포함해서 말이죠.

 

온 나라의 뜨거운 감자였던 박근혜-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문재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부당한 권력 사용·입시 비리 등으로 사람들의 분노를 샀던 전임 정부와 다른 기조를 가질 것이라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지요. ‘공정성의 붕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대통령이 이와 같은 언행을 한 것은 당연합니다.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바로 우리 사회가 오늘날 말하는 ‘능력’에 기반을 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과정이 공정하면 능력이 잘 발현될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전에, 우리 사회는 기회의 평등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을까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위 조항처럼 대한민국은 법률적으로 민주주의가 기반이 되는 국가입니다. 봉건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발전하면서 ‘일반 대중이 권력의 주인인 세상’이 기본 이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과연 민주주의에 어울리는 시스템일지에 관한 이야기는 매우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서로 의견을 공유하는 것을 하면 좋을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을 마치기 전, 제가 항상 인상 깊게 생각하고 있는 대사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항상 코믹한 요소로 쓰이는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마지막회의 엔딩,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시나요? 당시 신세경 캐릭터가 외국으로 떠나기 전 최다니엘 캐릭터에게 했던 대사를 옮겨봅니다.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죽기 살기로 그 사다리를 올라가면 또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결국, 못 올라갈 사람의 변명이지만.”

 

여러분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서로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Written by 김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