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飛翔)을 꿈꾼 청년 – 사회주의 비행사 윤공흠

2020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와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을 치르겠다고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한 1920년을 기념하는 학술 심포지엄 등의 행사가 많이 개최되었다.

임시정부의 ‘독립전쟁론’ 은 독립군 기지를 설립한 뒤 전문적인 무장독립군을 길러낸 뒤 국제적으로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었을 때 일제와 전쟁을 치르겠다는 독립운동의 한 전략이었다. 무장독립전쟁은 육군 중심의 독립운동도 있었지만 항공력을 활용한 항공독립운동도 있었다.

식민지 조선청년 항공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상대적으로 육·해군은 강하지만 공군력은 약하다는 판단하에서 항공력을 이용할 계획을 추진했다. 따라서 임시정부에서도 비행학교 설립과 비행사 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계획을 수립해나갔다. 국제적으로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기들의 맹활약 또한 그들로 하여금 더욱 항공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일찍이 비행기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항공력을 독립운동에 활용하고자 하는 비상을 꿈꾼 청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민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항공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들이 있는 반면에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항공독립운동을 펼친 이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윤공흠(尹公欽)이다. 송상도(宋相燾, 1871∼1946)가 기록으로 남긴 『기려수필(騎驢隨筆)』은 당대에 이름난 항일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답사와 여러 자료를 취합하여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남긴 기록으로써, 다소 오류가 있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인물들의 활동 등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자료이다. 이 『기려수필』에서 송상도는 의병을 포함한 독립운동 전 분야 총 207명의 항일 애국지사들 중에서 윤공흠을 소개하고 있다.

윤공흠은 1913년 5월 18일 평안북도 박천군 서면 금계동 령미에서 부친 윤영화와 모친 김영도 사이에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1923년에 박천군 가산면에 있는 가산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년 과정을 마치고 1928년 3월에 졸업하고 한 달 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16세였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고보)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위치한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이다. 특히 윤공흠이 향후 독립운동활동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친 학교이기도 하다. 경성고보는 초창기에 1900년 10월 3일 오늘날 서울시 종로구 화동 언덕에서 4년제의 관립 한성중학교로 개교하였으나 경술국치 후 1911년 11월에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명되었으며, 1921년 4월에 재차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로 변경되었다. 일제의 식민교육 정책에 따라 경성고보에 재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들과 다른 차별교육을 받았다.

경성고보를 중퇴한 윤공흠은 1931년 4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타치가와 비행학교에서 지상에서 비행교육을 받는 정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1931년 6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일시 귀국한 그는 1931년 8월에 다시 도일(渡日)하여 같은 해 9월에 비행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1932년 5월까지 조종사 연수를 받은 뒤 이등 비행사 면허장을 받았다. 그는 일본 비행학교로 입학을 결심하기 이전부터 고국 방문 비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32년 2월 14일, 「비기 구입해 맹연습, 오는 봄에 방문비행 – 조선의 항공계에 헌신」 [청년비행가 윤공흠군]

 

『동아일보』, 1932년 7월 5일, 「소년조인 윤공흠군 전 조선 방문 비행 ◇여의도 도착은 내일 6일◇ 명일 동경 타치가와 출발]

 

윤공흠은 일본에서 비행기를 구입한 뒤 일본에서부터 현해탄을 건너 조선 반도 전체를 비행하려고 했다. 이 계획은 이전에 누구도 실행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의 고국 방문 비행은 안창남의 비행 후 약 10년이 지난 뒤 1932년 7월 6일 일본 도쿄 타치가와를 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동아일보』는 이번 윤공흠의 고국 방문 비행을 안창남에 이은 ‘제2의 고국 방문 비행’으로 선전하여 한민족의 위상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국 방문 비행은 실패하였다.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당시의 항공 기술력이 초보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잦은 기계 고장과 기상 악화로 비행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심지어는 추락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이처럼 그때 당시에는 비행기를 타고 공중을 난다는 것이 생명을 담보로 하는 모험적인 일이었다.

고국 방문 비행 실패 후 윤공흠은 1933년 7월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했다. 한 달 뒤인 1933년 8월경에는 2기생으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간부학교)에 입학하였고, 1933년 9월부터 1934년 4월까지 교육을 받았다. 같은 해 1934년 4월 2기생 졸업식 때는 수석 졸업자 자격으로 학생 대표로 답사를 하기도 하였다.

졸업 후인 1934년 5월, 김원봉 등 의열단 지도부로부터 비밀 지령을 받고 조선으로 잠입한 윤공흠에게 항공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세칭 ‘남경군관학교 사건’ 이었다. ‘남경군관학교 사건’은 1934~1935년에 있었던 의열단의 국내 비밀공작 사건이었다. 이들 윤공흠을 비롯한 2기생들은 국내로 잠입해서 1기생들이 전개한 지부 결성과 기본 조직 확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항일 대중 투쟁의 연합을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런 점에서 윤공흠이 가진 장점인 비행술은 국내 특무 공작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가령 특무 공작에 필요한 무기의 운반과 수송에는 이등 비행사 자격증을 보유한 윤공흠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윤공흠 등은 1934년 6월 28일 경성에서 체포되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심경 변화를 느낀 간부학교 1기생 김세옥(金世玉)과 가족들에 설득당한 김찬서(金燦瑞)의 자수로 인해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남경군관학교 사건’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7월 17일, 「남경군관학교사건, 최고 5년역 구형 – 의열단 직계로 대활약하려는 윤공흠 등 8명 공판」

 

이후에 윤공흠은 신의주 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 반을 언도받았으나, 1년여의 형을 살면서 위궤양으로 병세가 위중해져 1936년 2월 20일 형이 집행 정지되었고, 곧 출감하였다. 같은 해 5월 5일, 자택 령미에서 치료를 받던 윤공흠은 용강 온천에 간다고 집을 떠난 후 행방불명되었다. 령미 주재소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던 중에 윤공흠의 부인 조영옥이 그보다 15일 전인 4월 말경에 친정에 다녀온 뒤 중국 안동현 모 병원 입원을 이유로 역시 행방불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부부가 공모하여 국내를 탈주했다고 보았다.

출옥한 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던 윤공흠은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서 1937년 조선의용군에 입대하였고, 1939년 연안 항일군정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 1941년 1월 태항산 팔로군 근거지에서 결성된 화북조선청년연합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3년 8월에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연안분맹에 배속되었고, 해방 직전까지 연안 분맹 위원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38선 이북으로 귀국하여 1946년 2월 조선신민당 중앙집행위원과 평남 임시정치위원회 총무국장, 1948년 8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겸 평북 책임비서, 1952년 11월에서 1954년 3월까지 재정상, 1954년 3월부터 상업상을 역임하였고, 2년 뒤인 1956년 4월까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광복 이후 윤공흠은 북한에서 줄곧 연안파의 수장으로 활동하였다. 연안파는 항일 투쟁 시기에 중국 섬서성 연안시 태항산을 근거지로 하여 일제와 맞서 싸운 조선의용군이 정치적으로 조직한 그룹을 가리킨다. 이들 연안파는 빨치산파·국내파·소련파와 더불어 북한에서 연립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김일성을 대표로 하는 빨치산파에 의해서 축출되었다. 윤공흠 역시 1956년 김일성의 유일 지배 체제에 반대한 소위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1974년 중국 산서성 방직공장의 병원에서 쓸쓸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그동안 항공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는 우파 민족주의 시각에서 많이 다루어져 왔다. 해방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대치하는 엄연한 휴전상황은 우리의 연구 풍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연이어 등장한 군사정권의 반공정책은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를 금기시하게 만들어 학문 역량의 다양성을 저하시켰다. 이러한 시각은 다양한 사상을 가지고 항공 독립운동을 펼쳤던 전체 인물상을 그리지 못하고, 한쪽으로만 치우진 역사를 기록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가령 이 글에서 다룬 사회주의자 항공 독립운동가 윤공흠이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윤공흠을 비롯하여 드넓은 창공을 향해서 비상하기를 원했던 수많은 식민지 조선청년들은 1920∼1930년대 중국·소련·일본의 비행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들 젊은 청년들의 노력은 1943년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공군설계위원회의 설치로 이어졌다. 1945년 3월 광복군 비행대 편성과 미국과의 합작으로 한국공군창설계획이 수립되었지만, 아쉽게도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망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비상을 향한 꿈과 도전은 광복 후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공군 창건으로 계승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Written by 김용진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