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소설에서 정절을 이야기하는 방법

들어가며

얼마 전에 세대 수가 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한국의 인구는 계속 줄고 있으므로 세대 수가 늘었다는 것은 1인 가구나 2인 가구가 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대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 사회가 이제는 흔적만 남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반만년’ 한국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한다. 그러면 가부장제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체제에 순응만 했을까? 가부장제의 해체기에 나온 구닥다리 이야기를 전공하는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가부장제의 유지기제 중 하나인 정절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를 들춰보고자 한다.

 

가부장제는 남성 가장이 가장권을 지니고 가족 구성원을 통솔하는 체계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은 자연스럽게 위계질서가 생기게 되고, 이는 철학적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 체제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열등한’ 여성 없이는 자손을 통한 유전자적 영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유전자 검사로 남성도 아이가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지만, 유전자 개념조차 몰랐던 전근대사회를 생각해보자. 여성의 배에서 나오는 아이는 다 여성의 유전자를 지니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네[父生我身 母鞠吾身]’라는 <명심보감>의 격언은 어떻게 보면 남성적 의심의 역설적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기에 남성은 여성을 끊임없이 의심하였고, 자신의 유전자 보존을 위해 여성의 성을 억압하였다. 그러한 사고에서 나온 서구의 대표적인 물건이 바로 정조대이다. 여성의 성기는 주인인 남편에 의해 통제되었다는 것을 이처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은 달리 없을 것이다.

 

중국과 조선을 지배한 유교는 보다 ‘세련된’ 방법으로 여성의 성을 지배하고자 했는데, 이는 사고의 통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서양에서 사고의 통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동양에서 물리적 제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경향성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정절이 바로 그것이다. 정절은 여성에게 남성에 대한 성적 독점을 당연하게 만들어준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은 여성을 ‘열녀’라고 하여 가문에 열녀문을 세우고 재물을 내리는 혜택을 주었다. 또한 <열녀전> 등 여성을 훈육하는 책을 공식적으로 관아에서 배포하였다. 그렇기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남편을 따라서 죽는 일은 당연해졌고, 심지어 나중에는 누가 잔인하게 죽어 모범이 되느냐로 경쟁할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웃지 못할 상황에 이른다. 이처럼 여성에게 가혹하게 요구되는 ‘정절’은 정작 같이 부부로 사는 남성에게는 요구되지 않는다. 도리어 정절을 배반하는 행위를 ‘풍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할 뿐이다. 정절의 은폐된 진실은 여성만이 그 의무를 진다는 점이다.

 

정절을 이야기하기

 

이는 지배 이념을 익히는 수신서적 요소가 강한 대장편소설에서 두드러진다. 대장편소설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조선의 궁중에 들어와 있던 소설 중 조선에서 창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장편소설들을 이르는데, 분량이 근대장편소설에 뒤지지 않는다. 이 대장편소설들의 시작이라고 여겨지는 <소현성록>이란 작품을 보자. 주인공 소현성의 작은 누나 교영은 남편이 반역에 몰려 같이 귀양을 떠나는데, 떠나기 전 어머니 양부인은 <열녀전>을 내리며 교영에게 읽기를 권한다. 그 후 남편이 먼저 죽게 되어 혼자가 된 교영은 <열녀전>을 읽지 않고 다른 남자와 밀통을 한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교영은 본가인 소씨 가문으로 돌아오지만, 귀양지에서 만난 남자가 교영을 찾는다. 이를 알게 된 양부인은 교영이 ‘외간 남자’와 밀통한 것을 알고 교영을 자살하게 만든다.

 

교영은 죽음에 이를 만큼 잘못한 것일까?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외간 남자와 하는 사통이라면 이 당시에는 죽음에 이를 만한 중대한 ‘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영의 사통은 남편이 죽은 이후에 이루어졌다. 남편이 죽고 나서 생을 유지하기 어려웠던 상태에서 경제력이 있는 외간 남자의 접근이라면, 이 사통이 설령 불륜이라도 죽음을 내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여성의 가문인 소씨 가문만 나오지, 남편의 집안은 역적으로 몰려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양부인, 아니 소씨 가문은 누구를 위해 정절을 지키고자 하는 것인가? 결국 소씨 가문은 가문을 위해, 그리고 그 가문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문제가 되는 개인을 배제한다. 이러한 교영의 ‘비행’은 뒤에 있는 소귀비의 행동으로 인해 더욱 해서는 안 되는 행동으로 부각된다.

 

소귀비는 소씨 가문의 여식으로, 어려서부터 <열녀전>을 충실하게 읽고 그에 걸맞는 행동을 취하여 결국 투기하는 황후의 뒤를 이어 황후의 자리에 올라 가문을 빛낸다. <열녀전>을 따르지 않아 ‘비참하게’ 자살당한 교영과 열녀전을 따라 ‘화려하게’ 황후로 등극한 소귀비는 수미상관적 대치를 이룬다. 결국 이 작품이 서사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열녀전>이 상징하는 정절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따르면 살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정절은 남성과 가부장제를 위한 도구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소현성록>을 예로 들었지만 정절 이데올로기를 다룬 서사들은 상당히 일상적이었다. 조선시대의 양판소라고 할 수 있는 영웅소설의 경우, 영웅이 되기 전의 주인공과 혼례를 치른 여성이 고난을 당할 때 가장 많이 보이는 화소가 정절의 위협이다. 물론 소설이기에 난관을 잘 해쳐나가지만, 이 당시 서사에서 이런 소재가 많이 보인다는 것은 정절이 훼손된다는 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상당한 위기라고 인식했다는 것을 뜻한다.

 

정절을 웃어넘기기

 

정절에 대한 서사가 위기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재미있게도 은폐되어 있는 남성 정절에 대한 우회적 문제 제기가 한문소설과 한글소설 모두에게 존재한다. 한문소설과 한글소설은 텍스트의 난이도로 인해 향유자가 다른데, 향유자가 다름에도 비슷한 소설이 나왔다는 것은 정절의 폭력성과 기만성을 포착한 눈 밝은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직접적인 해결책이나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보다는 우회하여 이를 조롱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이러한 소설은 주로 남성의 도덕적 타락을 중심으로 한다. 절개 있는 남성을 타락시킴으로서 절개를 ‘우스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절개=정절의 구도에서 본다면, 정절 또한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내용의 소설군은 이른바 남성훼절소설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소설 중 대표적인 소설로는 한문으로 쓰인 <지봉전>과 한글로 쓰인 <배비장전>이 있다. <지봉전>은 조선 효종 대를 배경으로 한다. 실존인물의 이름을 가탁했을 뿐 전부 허구를 다루고 있는데, 김복상이라는 관원과 궁녀의 로맨스를 그린 후 이들이 임금에게 들켜 이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들을 용서하려는 효종과 이를 봐줄 수 없다는 지봉 이수광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난다. 이때 다른 관료들은 다 풍류를 즐기는데 한번 봐줄 수 없냐는 효종의 말에 이수광은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며 당당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자 효종은 이수광을 색향으로 이름난 평양으로 보낸 후, 그의 절개를 꺾고자 평안감사에게 밀명을 내려 이수광을 유혹하라는 밀지를 보낸다. 이에 기생이었다가 그 신분에서 풀려난 백옥이 이수광을 유혹하고, 이수광의 취향을 파악해 그의 절개를 빼앗는다. 이수광은 서울로 돌아온 후 효종 앞에서 죄를 청하고 효종은 그를 용서하며, 김복상과 궁녀의 사랑을 허락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작품에서 이야기의 소재로 다루고 있는 것은 남성 정절이지만, 이는 애둘러 여성 정절의 문제를 우회한 것이다. 여성이 정절을 잃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같지만, 이론상 같아야 하는 남성의 정절에 있어서 과연 같은 무게로 다루어지는가? 정절이라는 것이 부부간의 상호신뢰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것이라면, 어느 한쪽만 이 의무를 지키는 게 비대해진 것이 과연 하늘이 내린 인간의 본성에 자연스러운 것인가?

 

이 작품은 이러한 무거운 주제를 숨겨놓고 있기에 도리어 끝까지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일견 보면 갈등이 폭발하진 않아 불완전하게 연소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수광은 번듯한 유자이지만 임금의 명령과 전직 기생의 노련한 수법에 넘어갔고 자신도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뉘우친다. 동시에 임금도 이수광의 일탈을 자신의 의도라고 하여 그의 흠결을 덮어주며 그가 원하는 대로 사건을 마무리짓는다. 결국 이야기는 모두 다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고, 내용만을 살펴본 독자들은 웃으면서 책을 덮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눈 밝은 이라면 작가가 진정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배비장전>은 <지봉전>보다 매운 맛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배비장전>은 판소리인 ‘배비장타령’에서 나온 작품으로, 안타깝게도 판소리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여 여성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고 선언한 배씨 비장을 주위의 관리와 기생인 애랑이 합심하여 골려먹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배 비장은 여성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선언과는 달리 너무나 쉽게 여성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애랑의 집에 들어가지만, 방자에게 알몸으로 쫓겨나 집 안에 있는 궤짝 안으로 들어간다. 이에 다른 이들이 궤짝채로 관아에 운반하여 그는 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망가지는 정도, 즉 풍자의 강도가 <지봉전>보다 훨씬 강하고 갈등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훨씬 명료하다. 배비장을 놀리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놀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는 정절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겨냥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정절을 강요한 것은 남성이지만 그 남성도 정절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비장전에서 나오는 웃음은 해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냉랭하다.

 

정절을 뒤집어보기

 

앞선 소설들이 정절의 모순을 드러냄으로 정절의 허상을 드러냈다면, 이번에 소개하는 소설은 여성 작가로 추정되는 이들이 남성의 정절을 보여줌으로서, 남성이 강요한 정절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여성들의 모습을 뒤집어서 표현한다. 위에서 소개한 대장편소설은 17~19세기까지 존재하던 장르였고, 따라서 전기 작품에서 의도했던 것들이 후기로 추정되는 작품에 이르러서는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들도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지금 소개할 <효의정충예행록>이다.

 

이 작품은 이름만 보면 소설이라기보다는 도덕 교과서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성을 위해 수절을 하는 남성이 둘이나 등장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색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여성에게는 정절을 강조하지만 남성에게는 ‘풍류’라는 이름의 문란함을 용인하는 대다수의 작품과는 상당한 변별점이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오늘날의 장편소설과 큰 차이가 없는데, 간략하게만 소개하자면 15세기 중국 명나라 성화연간을 배경으로 진씨 가문의 가정을 그린 소설이다. 주요 인물은 주인공 진창종의 둘째 동생 진창현과 그 장인인 정윤이다. 진창현의 부인인 정소저는 단강선이라는 여성의 모함을 들어 귀양을 가고 되고, 그 귀양지에서 도적을 만나 결국 자결을 선택한다. 진창현은 아버지와 형의 꾸지람에 의해 자신이 정소저에게 죄를 지었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이에 재혼을 원하는 가문들의 청을 모두 거절하면서 30세 이전까지는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지금이야 40대도 초혼이 많기에 별거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 살기 어려운 노총각, 노처녀를 다룬 작품인 <김신부부전>에서 나온 노총각 나아기 28세인 것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심각한 결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윤은 놀림을 받을 정도로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표출하며, 부인이 아들을 낳고 사망한 후 재혼을 하지 않는다. 지금과는 달리 성인 남성은 가정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재혼을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윤이 재혼하지 않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에 작가는 수절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여성 정절과 동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윤은 벼슬을 하던 중 난리가 일어난 곳을 찾아 진압하는데, 그곳에서 춘파라는 기생을 만나 유혹을 당하지만 바로 거절한다. 이에 춘파는 도적을 동원하여 배에 타고 있던 정윤을 협박한다. 그러자 정윤은 배를 부수고 물속에 빠져 죽음으로 자신의 절개를 지킨다.

 

진창현은 의견이 갈리겠지만, 정윤의 남성 정절 구현 양상은 여타의 여성 정절 서사와 유사하다. 이 서사에 대한 소설 내부의 평은 차치하고 보더라도 이러한 서사를 등장시킨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절은 사실상 여성만이 지켜야 하는 가치였고, 남성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남성의 정절이 나오게 된 것은 대장편소설을 주로 향유했던 여성 향유자들이 정절이 본래 쌍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암묵적으로 무시되었던 남성의 정절을 끄집어내 성리학적 가치를 전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작중에 나오는 남성 정절에 대한 조롱과 냉소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던 타인들의 시선이 형상화된 것이 아닐까.

 

나가며

고전문학, 특히 소설을 전공하면서 처음 느꼈던 생각은 ‘왜 다 똑같지?’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고전소설은 꽤나 유형성이 강하다. 말이 좋아서 유형성이지 다들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비슷한 것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비슷하다는 뜻은 결국 변별되는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살펴보다 보면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들도 간혹 등장한다. 이 글에서 소개한 작품들은 정절을 말하는 작품들 중에서도 정절에 대해 나름의 변별되는 시각을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이 여성을 억압하고 사고를 통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여성들 혹은 남성들이 그 질서에 마냥 순응한 것은 아니다. 개개인은 그 질서에 순응하거나, 미끄러져 나가거나, 비웃거나, 아니면 역전시켰다. 사람 사는 것들이 다 비슷하듯이 조선도 크게 다르진 않다. 조선시대의 소설은 그 평범한 진리를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숨겨놓고 있을 뿐이다.

 

Written by 정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