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래, 나 이제, 커버린 걸까 -’15년 만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다시 보다

*이 글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2021년 새해가 밝았지만, 일기예보는 유래 없는 강추위를 예보하고 있다. 거기다가 팬데믹까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나이를 코로 먹는 건지 입으로 먹는 건지 원.

 

보통 겨울이라고 하면 12월을 많이들 떠올리지만 신정과 구정이 있는 1월과 2월 모두 겨울이다. 어떤 의미로는 12월보다 더 춥기도 하고…. 하지만 크리스마스라는 상징성이 워낙 강해서인지, 다들 ‘겨울의 영화’라고 하면 크리스마스 시즌 영화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나 <비틀쥬스>로 시작해서 <러브 스토리>, <나 홀로 집에>는 당연, <러브 액츄얼리>를 지나 요새는 <해리 포터> 시리즈가 새로운 크리스마스 영화로 자리를 잡은 듯.

 

오랜만이라 서론이 좀 길지요? 이 말인즉슨 그래서 오늘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겨울의 영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말입니다.

 

 

이 영화가 왜 겨울의 영화냐고? 그것은 내가 느끼기에 가장 추웠던 겨울, 바로 수능이 끝난 직후 본 영화이기 때문이니까. (오, 나이가 전부 까발려지는데? 하지만 상관없다.) 다른 학교에서 수능을 본 친구와 중간에 만나서 어머님이 운전하시는 차를 타고 바로 극장으로 직행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만 해도 영화배우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앤 해서웨이와 에밀리 블런트, 그리고 메릴 스트립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사실 그 당시 이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조차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무도 몰랐을 거다). 이 셋 중 내가 알고 있던 배우는 앤 해서웨이가 유일했다. 그나마도 이전에 앤 해서웨이가 주인공이었던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봤기 때문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또한 앤 해서웨이가 엄청 예쁘게 나온다면서 유명했기에 보러 가게 된 것이었다.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이 있다. 2000년대 초반 이 책을 시작으로 칙 릿Chick Lit 열풍이 불었다고 하던데, 영화를 먼저 본 입장에서는 영화만큼 재미있진 않았다. 아무래도 패션 관련 내용이라 기본적으로 눈이 즐거워야 재미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참고로 원작 소설의 저자는 그 유명한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를 ‘미란다(메릴 스트립 역)’의 모델로 삼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기억에 남은 이유가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다 보고 나오면서 친구와 내가 엔딩을 두고 나름 격렬한 토론을 벌였기 때문이다. 의외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꿈에 대한 굉장히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냉철한 ‘미란다’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성공하기 위해 어느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외로이 설 자신이 있느냐는 것. 나와 내 친구는 바로 이 지점을 두고 토론을 벌인 것이다.

 

‘앤디(앤 해서웨이 역)’에게는 누구보다도 성공할 기회가 주어졌다. 자신이 원하는 길과는 조금 달랐지만, ‘미란다’의 비서라는 든든한 뒷배경과 메리트가 있었고 능력까지 있었다. 하지만 ‘앤디’는 결국 ‘미란다’의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이 진짜 하고 싶던 일을 위해 돌아온다. 나는 내가 ‘앤디’였다면 아쉽지만 똑같이 결정했을 거라고 했지만, 내 친구는 자기는 성공할 기회가 눈앞에 오면 절대 놓치지 않았을 거라며 아깝다고 했다. 그때는 내 생각에 흔들림이 없었기에 친구에게 당당하게 “아니! 분명 후회했을 거야!”라고 말했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결국 나도 변하고 말았다. 아주 조금이나마 현실을 맛보아서 그런가, 이런 걸 유연해졌다고 해도 될까. 여튼 지금의 내가 ‘앤디’와 같은 입장이 된다면, 내가 아주 혐오하는 분야가 아니고서야 몇날 며칠 밤을 새면서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 같다. 게다가 ‘앤디’는 ‘미란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일을 잘했고, 센스도 있었거니와 ‘미란다’를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배려도 있었으니. 성공과 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차피 다 잡을 수 없다면 한 마리 토끼라도 잡는 게 낫지. 왜 이래, 나 이제, 커버린 걸까. 뭔가 잃어버린 기억. 물론 ‘앤디’에게만 내보인 ‘미란다’의 외로움과 쓸쓸함, 고독함 같은 건 어쩔 수 없이 받는 대가겠지요.

 

그렇게 보자면 결국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미란다’가 되는 셈이다. 근데 그것이 바로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의 대단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어쨌거나 ‘앤디’의 선택을 ‘미란다’는 존중해주는 걸 보면 둘은 유사 멘토-멘티 관계였던 게 아닐까 한다.

참, 개인적으로 현실의 직장동기 같은 ‘에밀리(에밀리 블런트 역)’와 ‘앤디’의 관계가 재밌었다. 우당탕탕 툭탁툭탁 하는 귀여운 관계. 여기에 등장하는 ‘에밀리’가 나중에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복근을 뽐내던 ‘리타 브라타스키’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이야기.

 

 

참,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앤 해서웨이는 2015년도 <인턴>에서 패션업계의 떠오르는 CEO가 되어 로버트 드 니로와 호흡을 맞추게 된다. 이게 또 깨알 같이 재미있다. 괜히 프리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뭐 어쨌거나, 정말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그때는 여기 등장하는 브랜드를 하나도 몰랐는데 지금은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P.S. 1: 앤 해서웨이와 에밀리 블런트가 연기한 시상식 영상을 너무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에이미 폴러와 티나 페이의 2인조에 이어 최고의 호흡을 자랑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등장을 보고 인자하  게 웃다가 둘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연기를 시작하자 ‘미란다’로 얼굴이 싹 변하는 메릴 스 트립의 대단함.

 

*P.S. 2:  이로서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수많은 영화 중 두 편을 가지고 리뷰를 썼군요. 다른 영화들도 언젠가 다룰 때가 오겠지요.

 

Written by 박복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