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 상품이 될 때

누군가는 ‘터질 일이 터졌다’라고 했고, 또 다른 분은 ‘어쩜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하기도 했다. 예측과 경악 가운데 이 사건에 대해서 언론매체들은 사건의 당사자가 유명했었던 만큼 비난과 비판을 쏟아내었고, 당사자는 사과글을 SNS에 게시하고, 자신의 유튜브 채널과 진행 중이던 방송 프로그램을 내려놓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주된 비판점은 평소 강의를 진행하는 중에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태화관’을 ‘룸살롱’이라고 표현한 점이나, 나치 독일과 관련해서 홀로코스트에 희생당한 유대인의 시신으로 만들었다는 ‘비누괴담’, 5·16군사정변을 군사‘혁명’이라고 설명한 점, 한 고고학자가 사실관계가 틀린 것을 언급하기 힘들 지경이라고 발언한 ‘셀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아가 그가 쓴 석사논문까지 표절로 밝혀지게 됨으로써 그가 과연 재기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들 정도이다.

물론 그가 재기하든 안 하든 이 글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약간은 다른 시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논란이 되는가와 당사자의 전문성의 여부는 다른 매체에서 이미 말하고 있기 때문에 더 논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 대해 무슨 질문을 해야 할까? 그가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그는 교육학 석사이고, 또한 연구가 주업이 아닌 ‘교육콘텐츠’가 주업이었다는 사실에서 역사학계는 선을 그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라는 구체적인 분야가 언급된 이상, 이 사태에 대해서 생각할 자격은 충분하다. 이것은 지금 사건의 당사자가 생산했던 콘텐츠들을 소비했던 사람들의 문제로 보면 어떨까 싶다. 사람들은 왜 그에게 관심을 가졌을까? 역사를 주제로 한 콘텐츠는 왜 꾸준히 소비됐을까? 또한, 역사적 사실관계는 왜 이렇게 중요해졌을까? 역사적 콘텐츠는 자본시장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을까?

역사는 한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이 가진 과거 덕분이다. 식민지와 전쟁, 쿠데타와 민주화라는 수많은 경험을 거쳐왔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역사는 서로 다른 가치를 염두에 두는 세대별로 공통적인 인식이 맞물리는 분야로 주목받아왔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명제는 공교육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한국의 일정한 ‘진리’처럼 여겨지는 까닭이다. 교육에서 미디어에 이르기까지, 국민 전 세대가 ‘보는’ 콘텐츠에는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가 강조되었다. 이후 작게는 학교의 시험에서부터, 크게는 공무원 임용까지,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기 위해 교육되었던 역사지식은 또한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나아가 개인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꾸준히 인지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번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그가 EBS나 유수 교육미디어 그룹에서 경력을 쌓았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흔히들 교육시장이라고 표현하는 분야에서 그의 ‘이해가 잘 가고 재미가 있다는 점’은 주요한 경쟁력이었다. ‘쉽고 빠르게’ 암기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는 그는 신자유주의 시장에서 상품개발, 나아가 콘텐츠 시장에서 어떻게 이윤을 창출하는지 잘 보여주는 산 모델이었다. 한 국가에서 존재하기 위한 가치들이 시장에서 상품이 되었을 때의 논리는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지식은 삶을 풍요롭게 또는 잘 살기 위한 아이템이 되었고, 게임에서 치트키를 쓰는 절박한 마음으로 그의 강좌를 들어온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역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역사 지식이 인생에 더 중요해진 상황에서, 자신에게 하자가 있는 이야기꾼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이러한 점에서 신뢰성은 연구자가 아닌 강의자에게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그의 말은 진리인가?

‘무엇을 위해 역사를 공부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새삼 다시 꺼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본인을 포함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일생 고민하는 일종의 화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민족을 위해서, 누군가는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규명하고, 그것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오늘도 밤을 지새우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역시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통해 그 현상과 갈등을 이해하고, 그를 위해서 나 자신의 관점을 포함해 다양한 입장에서 여러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다양한 사람과 토론을 통한 사건의 해석과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어떻게 기르는 걸까? 단연코 의심이 출발점이다. 의심은 비판을 낳고, 비판은 담론을 키운다. 담론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이 옳거나 틀렸다는 것으로 쉬이 정의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가 쌓아온 이미지를 소비하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을 수도 있고, 이야기의 화제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와 비례하여 그는 ‘신뢰 있는 역사학자’의 반열에 올라 존경받았는지도 모른다. 아직 역사학자가 되어가는 단계에 있는 필자에게 이러한 모습은 사실 오래된 미래였으며, 당연한 현실이다. 같은 자장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불만을 들어왔고, 필자 역시 불만을 토로해왔다. 교육이라는 커다란 시장 안에서 벌어지는 ‘지식의 교환’에 익숙한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준비된 소비자들은 전문성을 잣대로 엄격한 평가 내린다. 그러나 그 지식의 교환은 ‘예능’과 ‘효율’을 극대화한 상품의 교환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건의 당사자는 철저히 상인이었고,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들어 의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리라.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고 싶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상인들을 공동체에서 배제했다. 배제의 이유는 공동체 안에서 교환‘만’ 담당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의 ‘행위’와, 재화의 교환에 있어 중개자로서 역할은 인정하지만, 교환의 상징인 ‘돈만을 담당하는 기능’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능은 딱히 이렇다 할 생산 없이 교환으로서 이득을 챙기는 행위, 즉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질적인 요소’로 비졌고, 이러한 ‘뛰어난 기술’은 좋은 신념을 남용하고 공동체를 멸망시키는 원인으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파렴치한 이윤’은 ‘가로챌 수 없는 시간’을 가로챌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는 시간과 그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지, 또한 그 의도와 생산품들은 인터넷상에서만 존재하거나, 녹화되어 물질화된 결과일지라도 이야기꾼과 훌륭한 스승들에 대한 이해와 그에 결부된 ‘상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다. 나아가 그에 따른 교환양식과 이들의 장으로서의 시장의 역할은 누군가 진리를 말하지 않든, 말하든 간에 누군가에게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그리고 더 나은 소비자의 욕구를 채움으로써 다양한 ‘디지털 수사’를 개발하는 생산자들에게도 이런 것들은 생산의 기술로서 기능했다. 하지만 지식의 내용은 바뀌기는커녕 그대로이다. 이런 측면에서 다음의 인용문은 참고할 만하다.

 

“……화식(상거래를 통해 화폐를 증식하는 행위)은 신기루와 같다. 마찬가지로 궤변술은 멋지게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무엇에도 기초해있지 않다. 그것은 조리정연하고 매혹적이지만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리정연하고 매혹적이지만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공허함, 이 실재의 결여는 소피스트들의 존재방식에서, 그들의 논증에 요란함과 지나치게 쉬운 성공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끌며 참신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허상과 유혹으로 가득 찬 담론에 대한 취향을 길러줄 뿐이다.(마르셀 에나프,『진리의 가격』133쪽)”

 

실제로 사람들이 허상과 유혹으로 가득 찼다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적에 따른 행동이 가지는 덕, 즉 목적을 명확히 가진 운동만이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교육’이라는 생산이, 과연 사회 공동체 안에서 자체 내 고유한 목적을 가지지 않는 ‘변형된 활동’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결과물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생산의 목적은 생산 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육하는 행동(가르치거나 또는 공부하는 행동)에 의해 구현된다. ‘모든 생산은 행동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행동은 무엇일까? 그것은 ‘앎에 대한 지향’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일련의 사태로 인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인가?’라는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우리가 겪어왔던, 혹은 우리 이전에 지나왔던 사건들은 수많은 토론과 합의, 나아가 비판과 궁리의 과정을 통해서 해결되어왔고, 해결되지 못했다. 사건의 당사자를 둘러싼 여러 상황은 재미를 위해 다른 시각을 통해 해석할 힘을 잃어버리게 했다. 이야기의 전달에 힘쓴 나머지 재미와 효율로 점철돼버린 이 상황에서 역사를 통해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고민된다. 논란의 당사자는 훌륭한 상인으로 남고, 그는 떠났다. 이어 또 다른 이야기꾼이 분명 그를 대체할 것이다.

 

Written by 이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