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내가 이 영화를 아니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이 글은 영화 <써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달 동안 쉬면서 그동안 썼던 영화 리뷰들을 훑어보다가, 앗, 어쩐지 외국 영화 이야기만 많이 하고 있잖아, 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한국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 했는데 바로 떠오르는 영화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오래도록 좋아했던 한국 영화는 뭐였더라? 여자아이들이 많이 나오는.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써니>였다. 내가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영화. 열 번 보면 열 번 다 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처음부터 가슴 설레며 볼 수 있는 영화. 지금은 모두 한 영화의 주연으로서 제몫을 해내는, 당당한 배우가 된 심은경, 강소라, 천우희를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영화, <써니>.

그렇게 생각하다가 11월 초에 넷플릭스에서 <써니>가 내려갈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나름의 사정(?)을 아는 이들은 HBO가 들어온다더니 CJ 계열사 영화들이 다 그쪽으로 넘어가려나 보네, 하고 이야기했지만 난 마음이 허전해졌다. 내가 외롭고 쓸쓸할 때마다 보았던 영화를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그럼 정말 <써니>에 대해서 써야겠군 싶었다. 이 영화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글로 옮겨야겠다고.

 

재미있게도 넷플릭스에서 <써니>가 내려가던 날, 나는 코로나 시대의 극장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았다. 재밌게 보고 나오는 길에 경향신문에 올라온 이종필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제안을 받았을 때 고민을 했죠. 여성 감독이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저는 영화 <친구>보다 <써니>에서 더 감흥을 느끼는 사람이에요. 게다가 제가 직전 영화 <도리화가>가 망했잖아요(웃음). 물론 망한 건 제 탓이고, 토익반 친구들이 인정받지 못한 건 구조적인 문제니까 결코 대등하게 볼 순 없지만 그래도 그 처지에 이입되더라고요.”

“어쨌든 여성 서사로 받아들여질 것을 염두에 둬야 했고 신경을 많이 썼어요. 내가 여자였다면 더 잘 찍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 많이 들었죠. 그때마다 물어보는 수밖에 없어요. 제작사 대표님부터 배우분들까지 여성이 많은 현장이어서 가능했어요.”

 

[인터뷰]‘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이종필 감독 “내가 여자였다면 더 잘 찍지 않았을까···”

 

이건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써니 2써니 3써니가 모여 내게 <써니> 리뷰를 쓰라고, 나를 빙 둘러싸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좋아, 까짓것 내가 써주지. 내가 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 영화가 어떻게 좋은지에 대해 써주지.

처음 <써니>를 보러 갔었던 건 단순히 강형철 감독의 이전작 <과속스캔들>을 재밌게 봤기 때문이었다. 먼저 본 주변인들 또한 재밌다며 추천했고. 그런데 이럴 수가.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사실 어떻게 안 울 수가 있겠습니까? ‘나미(유호정/심은경 역)’가 친정 엄마의 문병을 왔다가 학창시절의 친구, ‘춘화(진희경/강소라 역)’를 우연히 병원에서 재회하는데. 그것도 씩씩하던 그 시절과는 다르게 환자가 된 ‘춘화’를 말입니다. 이건 이미 울라고 만들어 놓은 설정 아닙니까. 사실 시작부터 비극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후반부에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군데군데 묘하게 현실적인 설정을 심어둔다. 그럼 자연스럽게 관객들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아, 엔딩에서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비극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제목처럼 햇빛 쨍쨍하다. 게다가 <써니>는 이때까지 한번도 주목받은 적이 없던 교복자유화 세대의 여성들을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와 빛을 비춘 작품이기도 하다. 결코 발랄할 수 없었던 그 시대를 의도적으로 발랄하게 그려냈고, 그러한 감독의 영리함은 제대로 먹혀들어가 700만 관객까지 달성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영화가 이렇게까지 잘될 수 있다니. 사실 <써니>가 흥행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다.

생기발랄하고 무서울 것 없던 어린 시절의 ‘써니’ 멤버들. 그러나 그들의 여정은 결코 평탄치 않다. 웃으며 만났던 그들은 눈물로 헤어진 뒤 자신이 꿈꾸던 것과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이름처럼 ‘금이야 옥이야’ 길러졌던 ‘금옥(이연경/남보라 역)’은 시어머니의 눈칫밥을 먹는 전업주부가 되었고, 부모님이 하던 미용실을 이어받는 게 꿈이었던 ‘복희(김선경/김보미 역)’는 가정이 금전적으로 몰락해 있는 등.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눈물로 만나 마무리짓지 못했던 ‘써니’의 전설을 다시 이어나간다. 특히 ‘나미’의 딸 ‘예빈(하승리 역)’을 괴롭히는 언니들이 출동하여 혼내(?)주는 장면은 나 혼자만의 명장면으로 남았다(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저도 모르게 그냥 통쾌해지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가장 명장면으로 꼽는 장면은 실연을 당하고 우는 작은 나미 옆에 다 큰 어른 나미가 앉아서 어깨를 기대게 하는 장면이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나는 과거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이 만나는 장면만 보면 운다. <맘마 미아! 2>에서도 그랬고. 여튼 이 장면만 보면 통곡 수준으로 운다. 사실 누구에게나 있는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건드리는 지점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된 내가, 어릴 때의 상처받은 나를 위로해주고 싶다는. 현실에서는 절대 이룰 수 없지만 영화는 픽션이니까 특유의 장치로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잖은가.‘나미’, 울며 집으로 돌아가기 1초 전. 이 사진을 보니 가슴이 또 아려온다.

그리고 어릴 때의 ‘써니’ 멤버들이 각자의 꿈을 이야기했던 비디오를 보며 어른 ‘나미’가 우는 장면이 있다. 이건 또 다른 맥락으로 슬퍼서 울게 된다. 앞서 말한 장면이 막연하게 슬퍼서 나오는 눈물이라면, 이건 좀 더 ‘향수’에 가까운 눈물이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지금과 비교되며 지나간 시간이 후회되기도 하고, 뒤늦게나마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행복하기도 한, 그런. 여튼 이렇게 갖가지 감정이 섞인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이 영화를 내가 아니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영화의 끝에서 ‘써니’ 멤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행복을 남긴다. ‘춘화’는 과거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현실을 힘겹게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가진 재산을 남기고, ‘써니’ 멤버들은 학교 축제 때 미처 선보이지 못했던 댄스를 추면서 ‘춘화’의 마지막 길을 웃는 얼굴로 배웅한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다짐한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결코 경제적 활동을 멈추지 않겠다고. 물론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어려울 때 가진 것을 베풀어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참 색다른 영화였구나 싶다. 어쨌거나 그 당시 여성들로만 채워진 영화 포스터가 내걸리고, 심지어 그게 흥행에 성공했으니, 그게 나한테는 무척 신선하고 고무되는 경험이었구나 싶다.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써니> 망령으로 남아 있는 걸지도. 개인적으로 좋았던 것은 <써니>에서 어린 시절을 담당했던 배우들이 전부 친하다는 것. ‘어린 수지’를 연기했던 민효린 배우가 결혼할 때 그 멤버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그 사진을 보고 그냥 내가 다 좋았다. 2020년 올해, 내게 최고의 드라마로 남았던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는 ‘어린 진희’ 역을 담당했던 박진주 배우가 나와서 감칠맛 나는 연기를 선보였는데 그게 또 왜 그리 반갑고 좋았던지.

영화 속 ‘써니’ 멤버들과 실제 배우들, 그리고 현실의 진짜 ‘써니’였던 모든 여성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번 리뷰를 끝마치고 싶다. 어쩐지 영화 <써니>에 대한 애정만 잔뜩 고백한 리뷰가 된 것 같지만 내 마음대로 쓰는 글이니 상관 없어.

 

*P.S 1: 저는 소녀시대의 멤버 써니도 무척 좋아합니다. 순규야 언니가 사랑해.

*P.S 2: 그나저나 자라면서 여러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서 일본판 <써니>가 너무너무 궁금하다. 2018년에 개봉했던데, 언젠가 한국판과 일본판 비교 작업을 꼭 해보고 싶다.

*P.S 3: 걸출한 여배우들을 잔뜩 배출해낸 영화 <써니>지만 어쩐지 출연한 남배우들은 좀 그런(…) 라인업을 자랑한다. 무려 이경영-김시후-성지루 삼단콤보(…)

 

Written by 박복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