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양반들에게 소설은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본의와는 상관없이 이미 이 말은 당신이 선택하는 것이 당신의 정체성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그렇기에 나는 그 말을 조금 바꿔보았다. ‘당신이 읽는 것이 당신이다.’

이는 옛날 사람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책이라는 것 자체가 사치재였던 기간이 그렇지 않았던 기간보다 훨씬 긴 것은 사실이지만, 옛날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경로로 책과 그에 상응하는 것을 읽고, 듣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나마 가장 가까운 옛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 특히 그 중 양반들은 무슨 책을 읽었을까?

사실 여기에 대한 데이터는 극히 제한적이다. 흔히 금속활자를 칭송하지만 조선시대에 금속활자로 쓰인 책은 극히 제한된 영역에서만 쓰인 이른바 희귀품이다. 금속활자가 많이 쓰이지 않은 이유는 문자의 체계가 한자이었기 때문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점은 인쇄에 있어 압착기를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포도주를 만드는 포도 압착기를 개량하여 쉽게 종이에 인쇄를 할 수 있었으며, 책을 인쇄한 후 사방으로 팔려나갈 상업적 유통망이 이미 존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의도적’으로 상업을 박대하였고 이는 꽤 성공적으로 이뤄져 금속활자의 상업적 활용은 극히 미미했다.

이에 현존하는 고서의 대다수는 필사본이거나 목판본, 혹은 목활자본이다. 물론 ‘성현’의 말씀인 「논어」, 「맹자」를 위시한 사서오경과 같은 경전, 그리고 오늘날의 반공서적과 비슷한 ‘교화’의 역할을 담당한 ‘행실도’와 같은 책은 국가에서 검수작업을 거쳐 정본을 만들어 금속활자로 만들어 인쇄했지만 그 이외의 책들은 금속활자로 만들 정도의 관심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양반들은 「논어」, 「맹자」를 위시한 ‘성인’의 정전만을 읽었을까? 물론 그런 양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양반은 딱히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조선에 뛰어난 유학자들을 제사지내는 곳으로, 문묘라는 곳이 있다. 이 문묘에 배향된 이 중 신독재 김집이라는 인물은 예의를 꼬치꼬치 따지는 예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골이 따분’한 학문을 실천한 사람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집에서 나온 책 중 「금오신화」에 수록된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그리고 유일본인 <왕시붕기우기>등의 소설이 5편 필사되어있는 소설집이 나왔고, 이는 그가 교정하고 열독했다고 거의 확신된다. 양반이라고 무조건 정전만 읽지는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양반들이 끊임없이 소설을 배척하는 언사를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자님은 괴이한 것과 폭력적인 것, 그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 신비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子不語怪力亂神], ‘공자님은 성왕에서 이어진 것을 덧붙여 부연했을 뿐,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았다. [述而不作]’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소설은 탄압되어야 하는 어떤 것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즉 소설이 다루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괴이한 것과 폭력적인 것, 그리고 신비한 것들이며, 소설이라는 장르자체가 기존의 장르와 상당히 다른 장르이기 때문이다. 어렵다고? 그렇다면 「삼국지연의」를 생각해보자. 「삼국지연의」는 어지러운 세상에 폭력적인 전쟁을 주 소재로 하는, 역사서도 아닌 그 무언가이다.

그러나 양반들의 욕망인 소설에 대한 배척은 순조롭게 이뤄지지는 않은 것 같다. 이는 역설적으로 양반들의 소설관련 비판이 계속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설비판이 계속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은 그 이면엔 소설읽기이 계속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판이 계속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그 비판대상의 기세가 멈추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음이라.

또한, 소설을 읽고 싶었던 양반들의 논리도 생겨났다. 쓸모가 있어서 읽을만하다는, 효용적 관점인 셈이다. 즉 본래 소설은 별로 읽을 만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일부의 소설들은 ‘훈육’대상인 부녀자를 계도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읽을만하다는 논리인 것이다. 대표적으로 악한 첩과 선한 처의 갈등을 드러내고 선한 처의 승리로 권선징악을 보이는 작품인 <사씨남정기>나, 나쁜 이복형과 그 어머니의 핍박을 우애와 효도로 극복한 작품인 <창선감의록>이 그러하다. 또한 한문소설의 경우 한문의 어려운 문리를 깨우치는데 사용한다고 서술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명종 때 윤춘년이라는 인물이 인출한 <전등신화교합구해>이다. 이는 중국의 괴기소설이라 할 수 있는 <전등신화>에 주석을 단 것이다.

그러나 효용과 필요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연 ‘소설을 통해서만 효용과 필요를 얻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즉 소설이 유교의 윤리를 체화하거나, 한문을 보다 쉽게 익히기 위한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훈육하려면 보다 직관적으로 메시지가 표현된 행실도나 열녀전을 읽게 하면 된다. 심지어 행실도는 삽화까지 실려 있어서 글을 몰라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한문문리를 깨닫게 하려면 정전을 초록하여 정선하면 된다. 그렇다면 효용론적인 논지를 펴는 양반들의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첫째로 생각해볼 점은 양반들은 소설을 통하여, 보다 적실하게 주입하고자 하는 개념과 가치를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사유에서 소설에 가장 가까운 것은 사(史), 즉 역사기술이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역사를 편찬한 이유는 단순히 역사를 있는 그대로 적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가치평가를 유도하여 독자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곧 역사를 비롯한 서사체를 통해 깨달음이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서사체에 대한 가치평가에 있어 이러한 사고는 바탕에 깔려있고, 이는 허구적인 서사라 할 수 있는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둘째로 생각해볼 점은 이 모든 효용과 필요에 대한 발언이 지배담론에 대한 알리바이라는 것이다. 즉 이들은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보고 싶고, 창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체면과 체통이 곧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지배담론의 통제력이 상당했던 전근대사회인 조선에서 ‘가장 쉽게 혼동되는’ 비정통 문학인 소설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긍정한다면 그것은 ‘쪽팔리는 일’이다. ‘사문난적’? ‘사문난적’정도 되려면 ‘성인’의 대행자인 주자의 권위와 싸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소설 따위로는 격이 낮아서 취급도 안 해준다고 보면 된다. 즉 소설을 옹호하고 소설을 공공연히 읽는 이들은 위험한 자가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자인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양반들은 왜 번거롭게 알리바이까지 붙이면서 소설을 읽었을까? 이들에게 소설은 역사와 경전이 결핍된 부분을 보충하는 보완물같은 존재이기 때문은 아닐까? 정통적 서사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서와 경전도 필연적으로 생기는 부족함과 불완전함, 그리고 부정확함을 가지고 있다. 이는 외려 공부를 오래하는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기에 문제는 심각해진다, 즉 공식적 문학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한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설은 사람들이 싫어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를 공식적으로 드러나면 꽤나 위험한 파괴력을 지니게 된다. 즉 성현의 가르침에 결핍된 무언가를 충족하기 위한 것으로 소설이 성립한다는 것이기 때문이기에 완전무결한 성현의 가르침이 결핍되어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에 대해 논하는 이들은 ‘일부러’ 이러한 논쟁을 용인할 수 있는 범위내로 한정하여 진행했다고 보인다. 오직 성현의 가르침을 보조하는 작품들만이 용인된 소설 창작과 향유였다면 이것을 한참 벗어나는 소설들이 등장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점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 조선왕실의 소설향유이다. 물론 왕실이라는 특수성은 있지만 양반들의 정점인 왕실에서는 소설을 향유가 일상화되었다고 좋을 정도로 많은 소설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효종이 「삼국지연의」를 구술로 번역하여 왕후가 필사했다는 것이나, 영조가 구운몽을 언급한 기사, 그리고 사도세자로 추정되는 완산이씨가 중국소설에 보이는 장면들을 그림으로 만든 「중국소설회모본」을 보면 임금들도 상당히 소설을 즐겨보았음을 알 수 있다. 정조의 경우 문체를 다시 순정하게 만든다는 문체반정의 기치를 걸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한 문학’을 펼치고자 한다. 이에 당직서다 중국소설 읽던 신하를 반성문을 쓰게 하거나, 말 안 듣는 유생은 군대를 두 번 보내는 등의 징벌을 가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행동은 ‘영민한 성리학적 군주’인 정조의 입장에서 볼 때 소설을 읽고, 소설이 가지고 올 성리학적 세계에 대한 균열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것이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사실 이외에도 조선왕실에서 소설을 즐긴 가장 직접적인 물증은 바로 창덕궁 낙선재에 있던 소설들이다. 이 소설들은 지금 성남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에 소장되어있다. 이른바 낙선재본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낙선재본 소설들은 중국소설들이 상당히 많이 옛한글로 필사되어 보존되어있었다. 따라서 초기 연구자 중 일부는 낙선재본 소설들이 중국소설을 번역, 혹은 번안한 소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될수록 명백하게 중국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즉 「삼국지」, 「수호지」, 「홍루몽」 등을 제외한 다른 소설들은 조선에서 창작한 소설이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낙선재본 소설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대개의 소설들처럼 악필이 아니라 매우 잘 정련된 궁체로 쓰였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잘 정련된 궁체로 쓰였다는 것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만 읽은 것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여성, 예로 들으면 왕후나 비빈들이 읽었다는 것이다. 즉 왕실과 궁중에서 소설을 읽는 것은 등한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화된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양반들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유원의 「임하필기」에서는 화가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의 집안에서 소설을 창작하다가 악몽을 꾸었다고 서술되어있다. 이 말의 진위는 어느 정도 차치하더라도 양반 집안에서 소설을 창작하거나 향유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 양반은 겉으로 끊임없이 소설을 부정하는 면모를 취하였지만, 그 행동을 보면 소설에 대한 가치를 포착하고 이를 우회하거나, 다른 명목을 내세워 소설을 ‘인정’한다. 이에 대응하는 조선의 소설도 이러한 사고에 순응하거나 역행하거나, 아니면 전유하거나 탈출하는 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포착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Written by 정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