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기억

5·18 민주화운동이 올해로 40주년이 되었습니다. 이미 40년 전 일이기에 크게 감흥이 없는 분도 있을 테고, 누군가는 여전히 5월 광주를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저마다 5·18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를 수 있겠지만 가슴 아픈 비극이자 거대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동의하실 겁니다. 물론 수많은 증언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이 가슴 아픈 현대사의 비극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정치적·사상적 연유로 대척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전히 북한의 소행이라느니 폭도들이 경찰을 인민재판에 부쳤다느니 하는 거짓을 믿는 것들도 가끔 존재하는 듯 합니다만, 누구 말대로 독재의 후예를 자청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당장 지난 5월 1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권 때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민정기씨는 “매년 사죄하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사죄를 하라는 것인가”라고 말하며 전씨가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2017년 출간된 전두환의 회고록에는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는 없었던 만큼 조비오 신부가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것은 왜곡된 악의적 주장이다. 조 신부는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다’라는 주장을 재기하다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2018년 5월 3일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제 또래 대부분은 기억하시겠지만, 지금과 달리 필자의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5·18을 다루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역사·사회 과목에서 현대사 부분은 시험 비중이 경미한 수준이라 제대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역사·사회 수업보다는 오히려 다른 교과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직간접적으로 5월 광주와 독재정권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필자의 경우 딱 한 번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5·18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수업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항상 “내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선생님 본명) 물러나라! 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해!”라고 말하시는 사회 선생님이 계셨는데 40분 전체를 5·18과 관련한 수업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아울러 이 선생님은 학생들이 창틀에 매달려 선생님을 향해 ‘물러나라!’라고 외치는 걸 부쩍 좋아하셨는데 그 이유를 한참 뒤에야―상상에 맡기겠습니다―알게 되었다지요.

필자의 경우 20대가 되면서 데모를 하다 보니 현대사에 부쩍 관심이 커지던 중 처음으로 전라도 땅을 밟으며 5·18을 진지하게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전라도청에 난 총알 자국, 금남로 대학생들을 향하던 백골단 등 처음으로 가본 5월 광주는 인상적인 것들로 가득했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망월동 묘역의 ‘전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 마을’이라는 글귀가 적힌 ‘전두환 비석’이었습니다. 이 비석은 묘역의 입구에 묻혀 있었는데 함께 간 데모를 하지 않는 선배들 몇몇이 중요한 유적이니까 밟지 말라거나, 대통령을 기리는 비석인데 어떻게 밞을 수 있겠냐는 되지도 않는 말을 하는 통에 화가 나 꾸역꾸역 비석을 밟으며 지났던 기억이 납니다. 후에 이 비석의 유례를 알게 되었습니다. 담양 한 마을에 전 씨가 방문했던 것을 기념해 만들어진 것을,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부숴 국립 5·18 민주묘지 묘역 입구에 묻고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 매년 5월이면 망월동을 찾게 되었지요.  데모를 하던 현대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던지라 민중가요 노래패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5월이면 5·18과 관련된 추모곡을 부르며 추모 공연을 하곤 했는데, 당시 추모 공연을 위해 노래를 가르치던 중 한 후배가 부르기 창피하니 공연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알려주던 노래는 ‘오월의 노래 2’라는 곡이었습니다. 후배에게 문제 되는 가사는 ‘두부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이라는 가사이며 정확히는 ‘젖가슴’이라는 단어가 나와 부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하지 말라고 협박을 해도 매번 서슴없던 그 후배를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가소롭기만 합니다. 또 다른 후배는 자기 아버지가 당시 광주에 있었는데 약탈도 봤고 자발적으로 어쩌고 했다는 건 다 거짓말이고 계엄군의 강간도 다 거짓말이라고 악을 쓰던 게 기억납니다만 얼마 전 결국 생생한 증언으로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4·3 제주를 지나 4·19, 5·18을 거쳐 2020년이 된 지금, 항상 5월 이맘때면 광주 정신 계승이 화두에 오르곤 합니다. 누군가에겐 이미 지나간 일이라 시큰둥할지 모르지만, 그때의 책임자들은 29만 원을 가진 채 골프를 치며 잘살고만 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는 지난해와 올해 5·18 민주묘지를 찾아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며 사죄의 뜻을 밝혔습니다. 어쩌면 ‘오월의 노래 2’ 4절의 ‘대머리’보다는 그나마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노랫말처럼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라는 물음은 여전히 답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5·18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을 짧게나마 이야기해봤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망월동에 들린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제법 된 듯합니다. 항상 광주 기행을 고민만 했었는데 역병이 끝나는 대로 한번 추진해보면 어떨까요?

 

 

Written by  박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