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더는 임신중지가 ‘죄’가 아닌 세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1년을 맞아

돌이켜 보면 그랬다. 나도 성교육 시간에 ‘낙태’ 반대 교육용 영상 <소리 없는 비명(The Silent Scream)>을 보았다. 자궁 내부를 초음파로 촬영해 임신중지 과정에서 태아가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28분짜리 영상이었다. 그 영상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84년도에 제작된 시대에 뒤떨어지는 영상이라는 사실도, 임신중지에 대한 죄책감을 심어주려는 의도로 기술적으로 조작된 영상이라는 사실도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또 기억나는 성교육 영상이 있다. 제목은 모르지만, 한 여학생이 남자친구에게 성폭력 피해를 겪고 임신하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것이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이라고 인지하게 된 것도 페미니즘을 배우고 나서였다. 당시에는 “남자와 함부로 성관계하면 불행해진다”라는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벌써 십수 년 전 이야기라고 구시대의 성교육을 비웃고 싶지만, 오늘날에도 성교육은 여전히 똑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2015년 교육부에서 제작한 「성교육 표준안」은 성폭력 예방 방법으로 ‘이성친구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지 않는다’와 같은 비현실적인 답을 제시한다. 그뿐인가. 피임이 필요한 이유는 ‘미혼모/미혼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위험한 낙태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가르친다. 피임 교육은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100% 피임률을 보장하는 피임법은 없다. 국가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성교육 표준안」에 예산을 쏟는 대신 미혼모/미혼부가 돼도 괜찮은 사회,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할 수 있게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지 않았을까.

 

정확히 1년 전인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입법부는 2020년 12월 31일까지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하며, 그때까지 ‘낙태죄’는 기존대로 유지된다. 그동안 각계각층에서는 단순히 「형법」, 「모자보건법」을 일부 개정하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를 들면 임신중지를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제하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개정, 유산유도제 성분 중 하나인 미소프로스톨(상품명:싸이토텍)을 임신중지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적응증 확대1)와 또 다른 성분인 미페프리스톤 도입,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따른 예외적인 경우에만 임신중지를 한 여성 근로자에게 유•사산 휴가를 제공하는 「근로기준법」 개정 등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좁게는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임신중지 전문 훈련과 인식 개선 교육이 시급하고, 넓게는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 캠페인, 홍보도 필요하다. 그런데 입법부와 정부 부처는 아직도 ‘어떤 사유를 허용할 것인가, 몇 주부터 처벌할 것인가’라는 좁은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임신중지에 관한 대중 인식은 국가 정책과 사회적 상황, 성교육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산아제한정책을 펼치던 시절에는 ‘가족계획’이 당연했다. 특히 1980년대에는 남아선호사상에 따라 ‘여아선별낙태’가 만연했다. ‘낙태죄’는 1953년 형법을 제정할 때부터 있었지만, 임신중지가 ‘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국가가 ‘저출산’ 문제를 부각하며 출산장려정책으로 급선회한 1990년대부터다. 비슷한 시기부터 낙태반대운동연합, 프로라이프의사회 등 임신중지 반대 세력이 등장하는 것도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국가가 생명을 하찮게 여기던 시대에는 임신중지를 하는 것이 애국이었는데, 인구감소 및 고령화 문제가 대두되자 갑자기 생명 존중 담론이 힘을 얻었다.

 

오랜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더는 여성 인권을 무시할 수 없게 되자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낙태죄가 필요하다’라는 해괴한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자 ‘임신중지는 개인의 선택’, ‘My Body, My Choice’라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퍼졌지만, 한편 임신중지를 한 여성에게는 ‘섹스를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쾌락만 즐기고 의무는 지키지 않는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우리 사회에서 ‘섹스’와 ‘쾌락’은 여전히 남성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책임’과 ‘의무’는 물론 여성에게만 강요되었다. 2018년 5월 법무부는 “강간 등의 사유를 제외한 자의에 의한 성교는 응당 임신에 대한 미필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할 것이므로 이에 따른 임신을 가리켜 원하지 않은 임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라는 변론요지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가 여론의 강력한 비판을 받고 철회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국가와 사회가 어떤 담론을 만들고 교육해야 할까? 국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지만 적어도 사회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약물로도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재생산권’이라는 개념도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용어가 됐다. 한 사람이 임신중지를 결정할 때 그것을 단순히 개인의 선택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다양한 상황, 조건, 환경, 맥락 등이 있다는 현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처벌은 임신중지를 막는 실효성이 없으며, 특정 사유/주수에만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법·제도는 권리보장의 사각지대를 만들고 당사자를 더 위험하고 취약한 임신중지로 내몰 뿐임도 명백해졌다. 임신중지 비범죄화는 전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지만, 그중에서 포괄적 성교육 시행을 강조하고 싶다. 포괄적 성교육이란 기존처럼 죄책감과 공포심을 유발해 성을 억압하고 규범화하는 성교육이 아니라 성에 관한 가치관, 문화, 권리, 관계, 건강, 평등한 의사소통, 피임 방법 등을 가르치는 성교육을 말한다. 성관계를 하기 전에는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고, 성병 예방은 어떻게 해야 하고, 피임은 어떻게 해야 하고, 임신 여부는 어떻게 확인해야 하고, 만약 임신이라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성폭력, 성병 감염, 원치 않는 임신 등을 방지하고, 혹시 임신중지를 하더라도 가능한 한 초기에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이뤄지게 할 수 있다.

 

입법개정을 통해 법·제도가 개선돼도 성을 쉬쉬하고 임신중지를 금기시하는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임신중지는 계속 ‘죄’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선고된 지 정확히 1년을 맞은 2020년 4월 10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임신중지 시술을 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살인죄’로 징역 3년 6개월과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산모가 미성년자이고 모친이 산모가 강간당해 임신했다고 주장해 낙태를 요구한 점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상”이지만, “임신기간이 34주가 되고 낙태수술 중 태아가 산 채로 태어났”다고 판단해 “생명은 존엄하고 고귀한 것으로 경시될 수 없다”라는 이유였다. 임신중지를 ‘살인죄’, ‘아동학대죄’ 등으로 기소·처벌하는 것은 미국에서 임신중지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1973)’ 대법원 판결 이후로 임신중지 반대 세력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이 사건에 대해 ‘낙태죄냐, 살인죄냐’, ‘임신 34주에 한 임신중지를 출산으로 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따지기보다 관점을 바꿔 묻고 싶다. 현행법상 강간으로 인한 임신은 모자보건법 제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에 따라 임신 24주 이내에는 합법적인 임신중지가 가능하다. 그런데 왜 이 사건에서 산모는 임신 34주에 불법 임신중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까?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가로막는 원인을 찾아 해결해나갈 때 비로소 비극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Written by 앎 

 

1) 적응증이란 어떤 약제나 수술에 의해 치료 효과가 기대되는 병이나 증상을 말한다.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적응증을 승인받은 경우에만 해당 목적으로 약제를 사용할 수 있는데, 현재 미소프로스톨은 이미 한국에 도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지에 관한 적응증을 승인받지 못해 유산유도제로 사용하면 불법인 상황이다. 미소프로스톨은 또 다른 유산유도제 성분인 미페프리스톤과 함께 쓸 때 더욱 효과적이지만, 미소프로스톨만 사용하더라도 높은 임신중지 성공률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