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웅, ‘뮬란’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

*이 글은 애니메이션 <뮬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전 <쥬라기 공원> 원고를 쓰면서, ‘살면서 가장 많이 반복해서 본 영화’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오늘 이야기할 <뮬란>은 내가 두 번째로 가장 많이 반복해서 본 영화다. 이 영화 또한 우리 집에 비디오테이프가 있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쥬라기 공원>과는 달리 <뮬란>은 동네에 있었던 킴스클럽 마트에서 직접 구입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 애들은 뉴코아·킴스클럽도 모르겠지 쿨럭쿨럭

 

그 당시 나는 공주를 동경하는 평범한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였다. (여기서 굳이 첨언하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여자아이는 여성스러운 것, 예를 들면 공주 같은 것을 동경하도록 주입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평범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뮬란>을 구입했던 이유도, <뮬란>이 공주의 이야기인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봤던 <뮬란>의 TV판 광고 속에서 모든 한나라 백성들이 ‘뮬란’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모든 백성들이 절을 올릴 정도의 여성이라면 당연히 신분이 높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뮬란>이 공주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디즈니에서 숱하게 나오던 그런 이야기가 있잖은가. 공주의 삶을 갑갑하게 여겨 엉뚱한 사고를 벌이고 말을 타고 질주하는 등 왈가닥처럼 굴지만 결국 공주로서 각성하여 큰 공을 세워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온 백성의 존경을 받게 되는, 그런 이야기.

 

바로 이 마지막 장면이 TV 광고에 나왔었기에

 

그런데 너무 놀랍게도 아니었다. 뮬란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몰래 남장을 하고 전쟁터에 나간 것이었다. 처음에는 체력이 약해 무시받지만 끊임없는 노력 끝에 부대에서 가장 우수한 병사로 우뚝 서게 된다. 예상치 못한 전장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대장 ‘리 샹’과 동료들을 구한다. 여성인 것이 발각나서 부대에서 쫓겨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 족의 ‘샨유’가 황제를 죽이려는 음모를 여전히 꾸미고 있음을 알고 분주하게 움직여 결국 적의 무리를 물리친다. 내가 제대로 맞춘 것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온 백성의 존경을 받게 된다’는 부분뿐이었다.

처음 이 만화를 접했을 때 나의 세상은 크게 흔들렸다. 좋은 의미로 충격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싸우는 여성 캐릭터들은 많았다. <요술소녀 밍키>, <세느강의 별>, <베르사이유의 장미> <달의 요정 세일러문>, <웨딩천사 피치>, <천사소녀 네티>, <카드캡터 체리>……. 그 전까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성 영웅 캐릭터는 <세느강의 별>에 나오는 ‘쟌느’였다. 하지만 ‘쟌느’와 ‘뮬란’은 너무 달랐다. ‘뮬란’은 ‘뮬란’이었다. 소녀도 별도 장미도 요정도 천사도 아닌, ‘뮬란’ 그 자체.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의 계시를 받게 되어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사건에 휘말려서 우연히 나라를 구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자기가 전설적인 존재의 환생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고, 길을 가다 신기한 고양이를 만나거나 이상한 마법 아이템을 주워서 그런 것도 아닌,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뮬란’은 전쟁터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몸과 머리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

이런 복장을 입고 싸우는 여성 캐릭터에게 익숙해져 있던 꼬마 여자애에게

정식으로 갑옷을 입고 싸우는 ‘뮬란’은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체력을 단련하는 장면이 전부 나오는 것도 좋았다. 내가 그때까지 봐왔던 작품들은 ‘초월적 존재’로 변신하면서 아무 노력 없이 힘이 세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내가 <뮬란>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I’ll Make a Man Out of You(한국판 제목은 ‘대장부로 만들어주마’)’다.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뮬란’이 어떤 훈련을 받으면서 점점 한 사람의 군인으로 거듭나는지를 보여주는데, 언제 들어도 가슴이 벅차다.

 

역시 더빙판으로 들어줘야 합니다

 (서영주, 김선동, 조남희, 이소정, 한진섭, 서울 모던 합창단 제창)

 

이런 부분 부분이 동북아의 문화를 잘 모르는 미국에서 제작했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 재밌다. 오리엔탈리즘도 있고, 잘못된 고증도 여러 개 있어서 욕도 먹고 아쉬운 부분도 많지만 또 이 지점이 만들어내는 어처구니없이 쿨한 장면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장면들을 정말 좋아한다. 황제가 ‘뮬란’을 황실 보좌관으로 임명한다고 명한다든가, ‘뮬란’이 황제에게 스스럼없이 포옹하는데 황제가 조금 놀라지만 이윽고 인자한 웃음을 짓는다든가(이 장면에서 야오가 “아무리 저래도 되는 거야?;” 하고 말하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그냥 훗 하고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하곤 넘어가버린다. 실제 중국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 그리고 몰래 나간 딸내미가 황제의 목걸이와 적군의 검을 갖고 돌아왔는데, “딸아 네가 우리 가문의 명예를 빛냈구나” 운운하지 않고 아낌없이 그 물건들을 버리며 딸을 안아주는…… 그 당시 동북아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뮬란’의 아버지라든가.

 

 

아, 언제 봐도 <뮬란>은 좋다. 아니, 나이가 들어서 다시 보니 어릴 때보다 몇 배나 더 좋다. 엔딩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는 순간 엄청난 쾌감과 감동을 느낀다. 이것은 내가 동양인 여성이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다. <캡틴 마블>을 보면서 느꼈던, 남성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그 쾌감과 감동에 결을 같이하는.

 

 

*P.S 1: 2020년에 나올 <뮬란> 실사 영화판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P.S 2: 아, 참고로 저는 <뮬란>을 절대 자막판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동북아시아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더빙된 영어로 쏼라쏼라 대는 꼴이 너무 눈꼴 시어서 뵈기가 싫거든요.

 

Written by 박복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