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월드 붐은…온다!

물 들어온다 노 저어라

인터넷 방송인 “침착맨”님이 TRPG 실황 방송을 시작하면서 “TRPG”, “던전월드”라는 키워드의 검색량이 부쩍 늘었다고 하더군요. 침착맨 방송을 보고 던전월드 룰북을 샀다는 사람도 인터넷 세상에서 종종 마주치고요. 던전월드의 출판사 도서출판 초여명에 따르면 던전월드 룰북의 판매량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고 합니다. 동호인이 적은 취미 분야는 이렇게 주류 미디어에서 가끔 날아오는 임팩트 한 방에 분야 전체가 출렁이곤 합니다. 아무튼 물이 들어왔으니까 노를 저어 보려고 합니다.

던전월드는 번역 출간된지 벌써 5년이 넘은 작품입니다. 만시지탄의 감은 있으나 던전월드의 특성을 소개하는 글을 써 봅니다. 던전월드는 모험 판타지 TRPG로, “D&D”와 같은 전통적인 TRPG와 외관상 꽤 많이 닮았습니다. 모험가가 있고, 물리쳐야 할 괴물이 있고, 신비스런 마법이 있지요. 그런데 룰북을 펼쳐보면, TRPG를 오랫동안 쉬신 분이나, 컴퓨터 게임 등의 대중 미디어를 통해서 TRPG의 이미지를 접하신 분들께는 당혹스러울 법한 부분이 툭툭 튀어나오곤 합니다.

 

턴이 없다

던전월드의 전투에는 턴(turn)이 없습니다. 전통적인 TRPG에서는 전투가 벌어지면 ‘턴’(또는 ‘라운드’)이 돌아가면서 한 명씩 행동을 할 기회가 주어지죠. 던전월드에는 턴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순서로 전투를 할까요…? 답은… 정해진 순서가 없습니다. 누구든 언제든 행동을 선언/묘사하면 그 행동을 한 것이 됩니다. 앗, 그럼 말 빠른 사람이 이기는 게임인가? 입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면 남들이 1번 때릴 때 내가 100번 때릴 수 있는 건가?! 그러나 말을 빠르다고 (그것만으로) 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습니다. 적을 타격한다는 선언을 1초에 10번 하더라도 적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던전월드에는 충격(damage)을 누적시켜 적을 쓰러뜨린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TRPG에서 전투는 스토리 진전과 분리된 미니게임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전투 없이도 이야기는 진전될 수 있지만, 전투가 미니게임으로서 재미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전투가 끼어들어갔습니다. HP, AC, damage, 경험치 등의 개념은 미니게임의 내적 논리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던전월드에서는 전투를 스토리와 분리된 미니게임이 아니라, 긴장과 드라마의 연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TRPG에서는 전투 그 자체가 재미있지만, 던전월드에서는 전투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전투의 의의가 이렇게 달라졌기 때문에, HP 등의 개념들에도 새로운 위상이 부여되었습니다. 이제 몬스터의 HP는 ‘체력’이 아니라, 연출되어야 할 스토리상의 ‘전환점’의 개수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용’의 HP가 16이라는 것은, 16번 때리면 용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험가들이 용을 물리쳤다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16번(또는 그 이하)의 전환점(약점의 발견, 기발한 작전의 도입…)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전투의 의의가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던전월드에서는 경험치와 보물을 얻기 위한 (그래서 다음 전투를 더 잘 치르기 위한) 전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극적 긴장을 해소(경우에 따라서는 형성)하기 위한 경우에만 전투가 등장하게 됩니다.

“침착맨 TRPG” 방송의 마스터는 90년대에 TRPG를 했던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죠. 이 때문에 일부 던전월드 팬들이 우려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과연 90년대에 하던 D&D와 던전월드의 차이를 파악하고 있을까 하고요. 그런데 실제 방송을 보니 전투가 드라마의 일환이며 이야기적 요구가 있을 때만 도입되는 것이라는 던전월드의 철학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모범적인 던전월드 마스터링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나리오가 없다

던전월드의 마스터는 시나리오를 쓰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시나리오 없이 게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을 권장하는 TRPG가 많이 나오고 있지요. 이런 방식이 유행하는 데에는 두 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첫째는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하는 TRPG가 마스터에게만 추가 노동을 강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스터를 기피하는 경향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완비된 시나리오가 오히려 이야기의 진행을 경직시키는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손에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 있으면, 마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시나리오에 준비된 경로대로 이야기를 이끌고 싶은 충동을 느껴, 플레이어들의 기발한 발상을 억제하게 된다는 것이죠. 던전월드는 플레이어의 기발한 발상을 권장하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폭주하도록 이끕니다.

 

어쩌면 원하던 바로 그 판타지

던전월드 고유의 특성은 더 있습니다만, 위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만으로도 이 TRPG의 지향점을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던전월드 가이드(http://cympub.kr/resource 에서 다운로드 가능)를 쓴 Eon Fontes-May 씨는 가이드 서문에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려 온 던전 모험 RPG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게는 전통적인 TRPG들이 그동안 “판타지 모험”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판타지 TRPG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대개, 신비스런 마법, 수수께끼같은 예언과 치명적인 위험으로 가득찬 환상의 세계를 기대합니다. 전통적인 TRPG들은 그것을 ‘마법 무기: 주사위 굴림에 +1을 줌’과 같은 방식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이 방식에 많은 사람들이 만족했지만,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좀 아쉽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진짜 신비는 ‘숫자’로는 묘사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던전월드는 이들, ‘+1’은 신비스런 마법을 묘사하기엔 부족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궁리하여 고안한 TRPG입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 그런 사람들에 속한다면, 던전월드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TRPG일 것입니다. 던전월드는 룰 전체가 무료로 공개되어 있으므로 (https://sites.google.com/site/dungeonworldkr/) 큰 비용 염려 없이 시작할 수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시지요.

Written by 이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