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에 대한 단상

최근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작가 이외수씨의 발언이 뜨거운 감자입니다. 그가 쓴 글 속에 포함된 ‘화냥년’이라는 단어 때문이지요. 이 단어를 두고 혹자들은 ‘환향녀’라는 말을 낮추어 부른 것으로 전쟁포로에 대한 비하이자 여성에 대한 비하라고 합니다. 또 누구는 ‘화낭’이라는 단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 것이므로 여성을 모욕하는 단어가 아니라고 합니다. 전자의 의미로 단어를 해석한 사람들은 이외수씨의 글에 다양한 유형의 댓글로 비판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이외수씨는 국립국어원이 채택한 언어의 어원은 후자임을 주장하며, 성난 댓글들을 그저 ‘잘 알지 못해 내뱉는 말’ 정도로 치부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꼼꼼히 들춰보지는 못했습니다. 필자가 이 사건을 안 것은 이슈가 된 이틀 후였고, 모든 사건이 빠르게 흘러가는 sns 세상 속에서 이외수씨는 이미 모든 글의 댓글창을 막아두고 해당 글을 모든 사람이 볼 수는 없도록 조치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단편적으로 사건을 들춰보았으니 단상으로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해당 사건을 바라보고 저는 ‘그저 그 정도인 사람의, 그저 그 정도인 면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양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이외수씨는 ‘철없음’으로 자신의 무례함, 내지는 타인에 대해 배려가 없는 행동을 미화해왔습니다. ‘기인’이라는 미학적인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하며 사회인이라면 지니는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마저 없는 행태를 방송에서 여과 없이 드러내었습니다. 이는 곧 ‘작가’라는 그의 직업과 맞물려 예술가에게만 주어지는 일탈허용과 같은 느낌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만일 이외수씨가 여성이어도 그랬을지, 저는 의문입니다.

시인 안도현은 수업 시간에 자신이 아내를 울린 이야기를 자랑스레 하며 ‘내가 참 철이 없다’며 껄껄 웃었고, 소설가 백가흠은 ‘조교가 이쁘다’며 수업시간에 대놓고 외모평가를 하고, 여학우들에게 ‘오빠’라고 부를 것을 강요했습니다. 물론, 자기 눈에 예뻐 보이는 여학우 한정이었습니다. 이 모든 행동들이 여자 작가였어도 예술가의 허용된 일탈이자 기인의 면모로, 글 쓰는 이의 순수한 ‘철없음’으로 미화될 수 있었을까요? 글 쓰는 이들은 생활 속 모든 일이 글감이 됩니다. 그러나 작가 신경숙씨는 동창이 뱉은 말을 글 속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는 이유로 엄격한 도덕적 잣대 위에 올라갔고, 철저히 동창 사회에서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타인을 존중하거나 배려하지 않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한 결과는 성별에 따라 다른 결과를 얻습니다. ‘철이 없을 권력’은 철저하게 남성작가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문단의 현주소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이런 문단 분위기 속에서 이외수씨는 여전히 ‘선생님’입니다. 안도현 시인이, 백가흠 소설가가, 이외수 작가가 여전히 기성작가로, 현업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 한국 문단은 그대로이겠지요.

#00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 흐름을 타고 #me_too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 문단계 내 성폭력 사건에 대해 많은 일들이 뭍으로 올라왔고, 그중에는 저를 가르쳤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운동을 접하고 저는 모든 피해자를 응원했고 문단이 조금이라도 더 여성에게 트이길 많이도 바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기존의 빛나는 별들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다수가 남성으로 이루어진 필진들의 세상 속 호모소셜은 피해자들의 발악과 외침을 명예라는 빛으로 가리우고 덮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이외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성폭력 피해자’라고 문단 내 수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를 고백했음에도 문단은 잠잠했습니다. 모든 외침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기성작가들의 빛을 조명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여성의 목소리와 시각이 철저하게 지워진 남성 집단의 창작물 속 여성들은 언제나 벗고 있거나 헌신하거나 아니면 둘 다 하고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남자를 가지고 놀다 버리는 팜므 파탈이거나 철저하게 남자에게 복속하는 노예였습니다. ‘아내가 결혼했다’ 정도의 작품 안에서나 여성은 주체일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 안에서 여성은 늘 대상화되어야 했고, 어여뻐야 했고, 고와야 했으며 신성한 모성을 지녀야 했습니다. 문단은 한 번도 여성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이라는 희곡이 나오고 한 세기가 흘렀지만 한국 문단 속 여성은 여전히 수동적 존재입니다.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붓을 놓지 않고, 붓의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외수씨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제아무리 예능을 통해 ‘철이 없는 기인’으로 자신을 포장해도 그는 결국 동양에서 유교 중심의 문화에 복속하며 철저히 가부장을 고수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평범한 ‘한국남자’인 그는, 그래서 ‘화냥년’이라는 단어가 여성들 사이에서 어떤 의미로 더 크게 와닿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자신에게 ‘화냥년’이라는 화살이 돌아왔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왜 그렇게 민감한지, ‘년’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떤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는 돌아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천박하게도 작품 여기저기에서 ‘년’이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성들에게 ‘년’은 단지 ‘여성’의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 아님을, 그에 앞서 우리 문화 질서에서 여성이 어떤 위치로 규정지어졌기에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뜻하는 본질적 언어를 입에 담기 힘들어 하고 욕설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그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다수의 한국 남성 작가들이 그럴 것입니다.

‘년’이라는 단어를 쉬이 쓰는 작가, 특히 자조적일 수 없는 남성 작가는 자신이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지 드러내는 작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타인이 듣고 싶지 않아 하고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괴로운 지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요. 사회 지도층도 아닌, 역사적으로 인류의 탄생과 함께 억압받아 온 존재인 여성의 위치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년’이라는 그 어미는 여성의 피부 속 깊숙이 굴욕감을 심어주는 언어이기도 한 것입니다. 단순히 사전적으로 ‘여성’이라고 번역된다고 하여서 여성이라는 성별만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닌 것입니다. ‘년’은 여성이라는 성별을 의미하는 단어이자, 여성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속해 있으며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역사성과 사회성도 포함한 언어입니다. 그에 대한 이해 없이 몰지각하게 “사전에서 ‘여성’을 뜻하는 말인데 왜 그 말이 잘못이냐”고 되레 묻는 듯한 행태는 아마도 이외수씨가 알려진 이름에 비해 공부도, 인성도 덜 된 작가라는 방증이 될 수 있겠지요. 그저 그런 사람인 이외수씨가 결국 그저 그런 해결방식으로 ‘화냥년’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달라는 사람들에게 ‘네가 몰라서 그래’라고 대처한 그런 사건으로 필자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공부도, 국어에 대한 이해도 미처 완성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 기성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 문단 안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여성혐오에 대한 단상을 이만 마치겠습니다.

 

Written by 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