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돌아오렴

다시 4월이 다가오는지 3월 한 달 동안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올해 4월은 지난 4월과는 다르지 않은가. 이제야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3월 초에는 진도와 목포를 다녀왔다. 이틀 동안 7개의 미팅을 참여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세월호가 올라오는 목포신항을 들렀을 때 내게 그곳은 삭막하고 차가운 공간으로 다가왔다. 검문소를 지나 넓은 잿빛 공간에 들어서면 세면이 펜스로 막히고 한 면은 바다와 큰 배가 막아서는 공간을 마주한다. 사방에서 cctv들이 그 차가운 공간을 빈틈없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채우고 있었다. 뱀처럼 긴 트레일러들이 제 몸집만한 철판을 실어 나르느라 분주했지만 흐르는 바람에 온기가 없었다. 한참을 걸어 세월호가 누울 자리에 서니 기분이 이상했다.

3월 말 즈음 국회에서 회의를 마치고 다시 진도로 향했다. 찬민 아버님은 진도에 주소지를 옮기고 살고 계시는데 그곳에서 묵어가기로 했다. 찬민 아버님은 진도 머무시면서 동거차도로 들어가는 물품들을 전달하고 계셨다. 우리는 다음날 찬민 아버님의 배웅을 받으며 서망항에서 동거차도로 향했다. 동거차도에서 내가 할일은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체인양과 관련한 기록물 생산, 수집정보를 총정리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동거차도 정상에 설치된 인양 감시거점에 생필품을 지게로 지고 오르는 일이었다.함께 간 피해자 가족들은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얼굴로 드러내며 바삐 걸었다. 가족들은 안내자에게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아는 걸 확인하는지 알 길이 없지만 말끝에서 불안함을 언뜻 언뜻 내비칠 때마다 미안함에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나는 아는 게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저 함께 걸어 다니고 함께 들을 뿐이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면서 문득 잘려진 선체 부품들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내가 못 본걸까 없어진 걸까. 그 큰 것들을 도대체 누가 옮겼을까. 이동하는 차안에서 나는 알지 못한다는, 알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젖어있었다. 그것만 몰랐다면 자책도 하고 혼나고 혼내기도 했겠지만 가족들과 나는 참사의 원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에 끓는 분노를 안은 채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래도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동거차도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일은 무탈하게 잘 해냈다. 그런데 문제는 첫번째 일이었다. 동거차도에서 가족과 주민들이 생산하는 기록물은 한정되어있다. 그들에게 정보는 아주 한정되어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멀리 보이는 바다위의 상황뿐이었다. 세월호가 점점 올라오자 해수부는 선체 뒤쪽의 램프를 절단작업을 통보한다. 이미 램프는 절단 된 뒤였다. 가족들은 해수부에 램프를 절단한 명확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하고 방제작업이 미비한 이유를 설명하길 요청했다. 하지만 해수부는 가족이 아닌 언론에게 대답했다. 모든 대답은 안전상의 문제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어떠한 작업 공정을 기록한 문서 원본이나 현장 상황을 알 수 있는 사진, 전문가의 분석과 견해 따위는 제시하지 않았다.

램프가 원인도 모르고 잘려진 때 기름이 잔뜩 흘러나왔다. 이때 동거차도 주민들은 작황이 좋아서 기대했던 미역 양식장을 버리게 되었다. 동거차도에서 어업을 하시는 주민들은 세월호가 침몰 한 후 경제적인 보상은 커녕 바다를 통째로 잃었다고 하니 그들 또한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일부를 잃었으리라. 배를 타고 나가 미역 다발을 흔들면 기름이 흩어졌다. 참사해역으로 나가 보면 방역작업을 하는 배들은 기름을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흩는데 더 신경 쓰는 듯 했다. 주민들이 해수부와 진도군에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려 했지만 겨우겨우 불러낸 진도군수가 하는 말이라고는 미역을 일단 팔아보고 안 팔리면 보상해주겠다는 황당한 답변뿐이었다. 그 와중에 해수부는 주민들과 대면조차도 하지 않았다. 416 피해자 가족들은 미수습자 수습과 선체 인양에 대한 정보의 부재에서 답답한 와중에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가져야 했다. 정작 가해자인 정부는 피해자에게 짐을 지우고 또 다른 피해자들을 늘려가고 있다. 3주기가 되도록 변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 속에서 세월호는 금요일에 돌아오겠다는 아이들의 약속처럼 금요일에 목포신항으로 입항했다.

 

감추는 자가 범인이다

 

세월호가 입항하기 전날 서울로 돌아와 다시 일상 업무로 돌아왔다. 나는 기록 관리를 전공하여 지금의 주 업무도 기록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기록 관리를 담당하는 내게 출처란 기록의 가장 큰 기둥과도 같은 정보다. 출처는 행위자나 소속기관, 부서, 기능 따위의 기록물 생산 맥락을 파악하는 주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416참사의 주요 행위자인 관련 공공기관 인물들의 공직 생활 이력은 정리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정보공개청구서를 각 기관에 넣었고 대부분 원하는 답을 얻었다. 그러나 해수부는 달랐다. 청구서를 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걸어왔다.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답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공직자의 소속, 직책의 이력은 정보공개법 제9조 제6항 라목에 적시된 공개사항이었다. 그들은 결국 비공개 결정을 내렸고 나는 이의 신청을 제기했다. 그리고 염치없게도 해수부가 다시 전화가 걸어왔을 때 나는 법조항을 확인 시켜주었다. 그리고 다시 목포로 향했다.

목포를 향하는 동안 나는 강제 종료 된 지난 특조위의 청문회를 생각했다. 청문회에 불려온 해수부, 해경 등 책임부처 책임자들은 기억나는 게 없을 뿐 아니라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분명하게 법령과 매뉴얼은 그들을 포함한 정부 주요 인사들을 책임자로 지목하고 있지만 본인들은 한사코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들에게 법치란 개념이 있는 걸까? 공무원으로서 최소한 국민에 대한 예의를 다해야겠다는 생각도 없는 걸까? 청문회 기록화와 내용정리 사이트를 제작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은 검증하는 자리에서 조차 본인의 책임을 외면하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되풀이 했다.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면서 조작된 기억이 사실이 되도록 기록을 왜곡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제시한 모든 기록들은 날조되거나 불충분했다. 근대국가는 행정상 모든 행위는 문서로 남기는 문서행정을 하지만 그들에게 행위와 기록의 일치는 쓰레기처럼 여겨졌다. 정보공개청구 과정에서 해수부가 보인 태도는 나를 점점 불안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목포에 갔을 때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해수부는 지금까지 그래왔지만 어떠한 작업 정보도 가족들과 공유하지 않으려 애썼다. 가족보다 언론이 보다 먼저 내용을 알고 있고 가족들도 언론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하루 두 번 한 시간씩 선체 곁에서 작업을 지켜볼 수 있었지만 그 어떤 정부 공무원도 가족과 동행하며 작업과 작업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에 갇혀있었다. 철제 담장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세월호를 바라보면서도 무엇을 하는지 왜 내 가족이 저기서 하늘로 가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은 답답한 마음에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종일 항만 앞에서 자리를 지키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노력하여 기록단을 꾸리고 촬영을 하고 변화가 없는지 묻고 또 물어서 뭔가라도 증거를 남기려고 노력하는 것은 해수부가 아니라 416참사 피해자 가족들이었다. 해수부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들이 아니라 세간에 보여 지는 정부의 이미지였다.

해수부는 생산한 기록물을 감추고 또 기록물이 담고 있는 내용을 감추어 스스로가 범인임을 자처하면서도 책임에 대해서는 한 발 물러서고 있다. 선체에서 발견한 유류품 중 전자기기는 가족 측이 세척하고 복원업체에 넘기는 과정을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해수부는 본인들의 책임이 없으며 새로 생긴 선체조사위원회의 책임만을 강조한다. 수령증과 같은 공식문서에도 해수부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제는 기록과 기억을 왜곡하는 것을 넘어 책임을 부정하고 책임행위를 거부하며 기록물 생산을 거부하는 것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인된 삶을 위하여

 

이제는 정부가 사실을 숨기고 왜곡하는 것을 참아선 안된다. 궁금한 것은 묻고 따져야 한다. 그리고 불필요하거나 불법적인 행위가 없는지 책임을 다하는지 행위에 대한 기록물을 생산하는지 감시하고 강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일은 도대체 누가 해야 할까? 직접적으로 피해 받는 사람들이 해야 할까? 그들은 이미 하고 있다. 처절하게 짓밟힌 삶을 딛고 일어나 끝없이 대거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왜 고쳐지지 않을까? 그들은 적기 때문이다. 큰 권한과 그 권한을 움직일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정부는 소수의 의견이라 치부하며 배제하면 그만인 일이다. 정부에게 그들은 주인 된 사람들이 아니다. 피해자 개개인이 스스로의 주인이고 국민의 일부일 수는 있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개인이 또는 소수가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만큼 국가를 좌우할 권력을 지닌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많은 시민들이 함께해야 고칠 수 있다.

집단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다수가 되어야 함은 틀림없다. 그런데 어떻게 다수가 되는가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관점도 방법도 너무나 다양하여 모두 열거 할 수 없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주인 되기 위한 조건은 하나다. 동의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동의를 얻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상대의 자발적 동의를 얻는 법과 폭력적 수단과 방법으로 강제하여 동의를 얻어내는 법 두 가지다. 여기서 416참사 피해자 가족들은 전자의 방법을 택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고 있다. 그렇게 가족들은 시민들과 함께 이 땅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가족들이 주저앉아 동의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기억과 기록의 조작, 은폐 행위는 ‘몇몇 누군가’가 아니라 ‘누구라도’ 생명을 잃는 상황까지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드러내고 있다. 가족들의 실천은 가족의 특권적 지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개인이 삶의 주인 되어 큰 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하고 큰 힘의 주인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공감하려 한다.

416참사 피해자 가족들이 이렇게 주인이 되기 위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스스로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다. 물론 먼저 미수습자 가족들은 가족을 품에 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족이 하늘로 떠난 근본적인 원인을 안 후 책임자를 처벌하고 제도를 고쳐 지금까지의 억울함을 풀어나가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고 억울한 이들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함께 풀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필요하고 동의를 표현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1600만의 촛불이 탄핵을 이루어 냈듯이 시민들과의 연대로 투명하고 공개적인 미수습자 수습과 선체 조사를 이루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책임 기관은 책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사실이 기록되고 공개되도록 해야 한다. 부디 그렇게라도 하여 피해자 가족들의 마음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렸으면 한다.

나는 종종 감명 깊게 들은 노래는 한곡이든 열곡이든 몇 날이고 몇 달이고 귀에 달고 산다. 그래서 우연찮게 듣게 된 이희진의 해원이 일 년 전부터 내 귀를 떠나지 않고 있다. 가사가 416참사의 진상규명을 열망하는 가족과 시민들의 마음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 가사를 전달하며 글을 맺으려 한다. 부디 많은 이들이 끝까지 함께하길 바란다.

이희진 – 해원

 

그대 떠나 보내고 종일 열에 들뜬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대 가슴에 묻고 눈을 가리는 모든 말에 귀를 닫았다

 

그대 왜 떠나야 했는지 피지도 못하고 졌는지 묻는 것조차 두려웠던 날

그대 왜 가슴에 담지 못하고 떨쳐 버리려 애썼는지 지난 부끄러웠던 날

 

다시 잊지 않겠다는 그 말 한번만 더 믿어 주시고 이제 맺힌 그 마음 풀어 버리시라

다시 잊지 않겠다는 그 말 맺힌 이 가슴 믿어 주시고 이제는 편히 눈 감으시라

 

다시, 다시 꼭 살아오시라 우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지켜보시라

사랑, 사랑하는 사람들 위해 우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지켜보시라 꼭 지켜보시라

 

 

Written by 신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