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의 불을 켤 수 있을 것인가? : 믿음과 신종교

인간은 무엇인가 ‘믿는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믿음이 있었고, 그것들은 사라지거나 또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믿음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비단 철학적으로 느껴지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믿는다’라는 언어 안에 많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지극히 추상적인 것이라 ‘뜨뜻미지근’한 그 무엇인가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재적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가 눈을 떠서 바라보고 행동하는 ‘지금 시간’을 살지만, 금세 이 시간은 지나가 버린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을까?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믿음에 대한 많은 논쟁들이 있어왔고, 그 가운데 믿음에 대한 구체적인 논증을 시도한 것은 기독교이다. ‘성’ 삼위일체에서부터 예수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리를 만들어 온 배경에는 그것을 ‘믿어야 하며’ 또 그것을 통해 논리를 통한 ‘교리(doctrine)’가 생겨왔기 때문이다. 즉, ‘믿는다’는 전제 아래에 많은 행동들을 만들어 왔으며, 그 가운데 핵심은 ‘특별한 것(또는 신성한 것)’과 ‘일상적인 것(또는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특별한 논리를 끊임없이 만들고 변화시켜 왔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종교학자 맥커천은 믿음에 대해서 흥미로운 예를 들었다. 불 꺼진 방에 들어간다고 상상해보자. 불 꺼진 방에 들어갈 때 우리는 문을 열고, 벽을 더듬으며 전등과 연결된 전기 스위치를 찾는다. ‘스위치를 찾고 난 후’ 스위치를 누르게 되는데, 불이 켜질 때도 있고, 켜지지 않을 때도 있다. 불이 켜지면 정말 다행이지만, 켜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누군가는 핸드폰의 조명기능을 이용하여 들어갈 수도 있고, 약간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초를 켜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들어간다고 해서 ‘바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전기를 사용해 버튼을 누르면 방 조명이 들어와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일’이 우리에게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고, 그것은 우리가 일정한 교육이나 의식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 우리가 방에 들어가려면 방 스위치를 켜서 불을 켠다는 일도 우리가 알아서(또는 배워서) 그러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상상을 해보자.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행위의 인과관계가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사실 ‘당연히’ 되는 경우는 살아가면서 1퍼센트도 안 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행동의 원인과 결과가 일정한 법칙에 의해 ‘당연히’ 결과가 나오기를 바랄 때가 많다. 지금 뉴스만 봐도 그렇다. 우리가 시세차익을 위해서 부동산을 사면, 당연히 땅값이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수많은 변수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손해를 본다. 붙을 것이라 기대한 시험을 준비하면서, 합격할 것을 ‘기대 만’한 사람들은 떨어질 확률이 높다. 반세기 전만 해도 동성애가 ‘비천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이로 인해 생물학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정상적인 결합’만이 축복받을 만한 일이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과학적인 방법들이 동원되었지만, 그 과학은 당시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나아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찾아왔지만, 사실 우리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해결된 일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한 번의 행운’이 찾아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해결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금 그런 일들이 벌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너무나 쉽게 정치와 관련된다. 일정한 체제 안에 사는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는 자와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는 자들로 너무나 쉽게 양분하지만,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많은 믿음과 바람,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고, 그것을 실제로 이루기 위한 권력들을 동원한다. 반면 우리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믿는 만큼 실망도 크고, 또 그 기대가 얼마나 ‘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이 우리의 기대와 들어맞지 않을 때 누군가에게는 놀라움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생겨난다.” 이러한 놀라움에 대해서 기대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들과 매우 관련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자들은 현자라고 불리기도 했고, 이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돌리는 자들은 ‘사기꾼’ 또는 ‘요망한 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람이 어떤 것을 믿게 만드는 것과,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 일들은 다른 종류의 일들이지만, 예전부터 ‘진실’과 ‘진실과 비슷한 것’을 구분하기 위해 몇천 년이 흘러야만 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짧게는 1945년 이후 인간의 이성이 꼭 그렇게 ‘선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이후에도 ‘과학적 방법을 통한 진리’의 욕구는 현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지금 대통령이 ‘천공 법사’라는 사람의 말을 따라 정치를 행하는 일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라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조선 후기에는 ‘모두가 잘살게 되는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에 의해 동학과 자신이 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현재 진행형이다). 이러한 믿음의 방식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 세상에 대한 실망감과 피로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실망과 피로는 ‘개벽’의 필요성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 기반하여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측정되거나 실제적으로 추론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는 사람이 살던 시대에 대한 인상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인상은 쉽게 믿음으로 이야기 되어져 지금의 눈으로 그것을 허황된 것이라고 쉽게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그때는 이러한 기대가 소용 있었지만, 지금은 지금과는 다른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발전이라는 말이 꼭 인간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 판명된 지금, ‘다원성’과 ‘탈근대성’이라는 말이 너무나 쉽게 쓰이는 ‘근대적인 시기’에 ‘새로운 믿음의 역사(歷史)’는 계속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치권에 떠도는 ‘믿음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일부 사람들이 바라는 그러한 세상에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공이 말하는 세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을 믿는 대통령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 또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들 둘이 행하는 믿음과 믿음의 행위가 한국을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배척할 수 없다. 이미 그들은 그들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상식을 만들고 그것을 행위하는 한, 나아가 불 꺼진 방에 스위치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불을 켜보겠다고 말하는 것은 ‘전망’에 가깝다. 우리는 불 켜진 방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불이 켜지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금 고민해야 할 것이다. 불을 켜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말하는 방식들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들의 믿음을 비난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불을 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이 꺼진 방에 불을 켜기 위해서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해왔다. 하지만 그 방법들은 그 유효성을 따지기 어렵지만, 우리에게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 자장 안에 우리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삶과 믿음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적어도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 개인의 욕심과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신종교의 교주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이름조차 발견하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일정한 믿음에 동의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 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발현되는 많은 현상은 모두가 감당할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번 더 생각하자. “나의 믿음이 ‘나’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것인가?” 불을 켤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스위치를 찾아 또 벽을 헤메야 하기 때문이다.

 

 

Written by 이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