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몸의 인지과학

I. 책과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은 인지과학에서의 고전적 계산주의(이 책에서는 인지론cognitivism)이라고 한다)가 봉착한 한계를 설명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전 10년 사이에 제안된 아이디어인 연결주의(connectivism)와 체화된 인지(embodied mind) 이론을 저자 자신들의 독창적 관점으로 소개할 목적으로 쓰였다.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이미 고전이 된 책으로, 나온 시기가 1991년인만큼 인지과학의 최근 연구 성과는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이 시기에 각광받았던 연결주의와 체화된 인지라는 아이디어가 2016년에도 아직 유효하므로, 현재 시점에서도 교양서로서의 생명력은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몸의 인지과학은 프란시스코 바렐라, 이반 톰슨, 엘리너 로시 3인이 공저한 책으로, 1991년에 세상에 나왔다. 저자 세 사람은 각각 생물학, 철학, 심리학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인지과학 분야에 족적을 남긴 대표적인 학자들로, 인지과학의 현대적 조류가 성립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저자들은 현대 인지과학의 연구 성과를 섭렵하였을 뿐 아니라, 유럽 대륙철학과 불교철학의 학설에도 정통하여, 철학으로부터 얻은 통찰을 엮어 인지과학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이 글에서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는 이 책의 깊이를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역량의 한계가 있으므로, 단지 이 책에서 다루는 인지론, 연결주의, 체화된 인지 이론의 발달사를 요약하여 소개하고 소감을 말하도록 하겠다.

 

II. 인지주의와 그 한계

 

한 분야의 학문이 급속히 발전하면, 그전까지 그리 큰 연관이 없었던 주변 학문 영역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가령 물리학의 복잡계 연구 방법론이 주류경제학에 도입되어 성립된 경제물리학(econophysics)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인간 심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지과학의 성립에는, 어찌 보면 엉뚱하게도 20세기 컴퓨터 기술의 발달이 큰 영향을 미쳤다.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고 그 뛰어난 연산능력이 세간에 대두되자, 해명되지 못한 신비의 영역에 있었던 인간 정신의 활동이 어쩌면 컴퓨터와 원리가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즉 컴퓨터가 신호를 상징적 기호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작하는 방식 – 즉, 계산(computation) – 으로 업무를 수행하듯이, 인간의 정신도 상징적 기호 조작을 수행하는 정보처리 기계로 이해하려고 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자 몇몇 과학자들이 인간을 컴퓨터에 은유하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입력 장치, 처리 장치, 기억 장치, 출력 장치 등의 덩어리로 나누어져 있듯 인간의 인지 체계도 부문(module)으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감각 기관으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정해진 계산 원리에 따라 계산하여 출력하는 것이 정신 활동의 본질이라고 이해되었다. 이와 같은 정신관을 인지주의 또는 인지론(cognitivism)이라 하고, 마음의 계산 이론(computational theory of mind), 고전적 계산주의(classical computationalism)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인지주의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를 통과하며 일세를 풍미한 뒤에, 수많은 비판을 맞이하였다. 인지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러 학문 분야의 다양한 방향에서 이루어졌지만, 특히 이 책에서 예리하게 지적하는 인지주의의 약점은, 인지주의가 의식과 자아의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계를 경험하는 ‘나’라는 것이 있다는 감각이 자아이고, 내가 지금 깨어서 세상의 이런저런 자극들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 의식인데, 인지주의적 정신 모형에서는 정신의 어디에 자아와 의식이 들어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인지주의의 또 한 가지 약점은, 인지주의가 인지능력의 생물학적 유연성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징적 기호조작 기계인 컴퓨터는 기호나 계산규칙에 고장이 생기면 기계 전체가 못 쓰게 망가져 버린다. 그런데 인간의 인지능력이나 인지내용은 부분적인 손상이 생겨도 나머지 영역은 그런대로 잘 작동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때, 그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얼굴과 행적은 기억하는 부분적 회상은 얼마든지 일어난다.

 

III. 연결주의와 창발

 

인지주의의 문제점이 점차 선명해지자, 인지주의의 대안으로 제안된 관점 중 하나가 연결주의(연결론)이다. 연결주의는 인지과정이 하나의 유능한 ‘중앙처리장치’의 지배 하에 이루어지는 계산 과정이 아니라, 단순한 임무만을 수행하는 아주 작은 단위들의 집합에 의해 상호공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이디어에 토대를 두고 있는 관점이다. 이와 같은 ‘연결적’ 아이디어는 인지주의의 대두 이전에도 몇 차례 제안되었던 것이었다. 신경세포가 그물처럼 엮여 이루어진 뇌의 구조를 보면, 작은 단위들의 결합이 복잡한 임무를 공조적으로 수행하는 모형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법도 하였으나, 인지주의의 융성기에는 연결적 관점이 그리 주목받지 못하였다.

연결적 관점이 새롭게 주목되게 된 것은 70년대를 지나며 인지주의가 해명하지 못한 문제를 연결주의가 해명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연결주의는 인지주의가 설명하지 못했던 생물학적 유연성의 원리를 정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연결주의에서 기억내용이라는 것은 수없이 연결된 신경 세포들의 연결 강도의 패턴이고, 이 패턴 중 ‘친구의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은 손상되어도 나머지 기억내용은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예는 설명을 위해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지만, 연결주의는 이 외에도 수많은 인지 현상을 인지주의보다 정합적으로 설명해낸다. (154-161)

연결주의는 인지과학의 전통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연결주의가 자아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더 흥미를 느낀 것 같다. 앞서 인지주의는 자아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연결주의는 자아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연결주의적 관점을 따르는 마빈 민스키와 시모어 파펫은, 인간 심성(마음)을 제각각 다른 능력을 가진 대행자(agent)들이 이루는 하나의 사회로 은유했다고 한다. (179) 제각각 능력도 행동양태도 다른 대행자(이것은 신경세포의 일정한 크기의 집합에 제일 가깝지만 꼭 물리적 실체와 일대일대응되는 것 같지는 않다)들은 다시 서로 연결되어 더 큰 단위의 대행체를 이루고, 대행체들은 다시 더 큰 단위의 대행체에서 대행자 역할을 한다. 민스키와 파펫의 결론은 진실로 존재하는 자아는 없지만, 인간의 지각이 크고 작은 단위의 대행자의 총체인 대행체를 자아로 믿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IV. 체화된 인지

 

체화된 인지는 인지주의가 가진 문제들을, 연결주의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해명하기 위해 1980년대에 제안된 관점이다. 이 관점의 주요한 문제의식은 이전의 인지주의가 정신을 인지, 감각, 의식 등이 드나드는 추상적 공간으로 취급하고, 정신과 상호작용하는 물리적/생물학적 실체인 신체와 신체와 상호작용하는 환경이라는 조건을 무시하면서 이론을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신체와 정신의 이분법은 인지주의뿐만 아니라 데카르트를 거쳐 희랍철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관의 유구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인지는 사실 인간에게 주어진 물리적/생물학적 조건을 벗어나 이해될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거울에 비친 상이 물체의 좌우를 반전시켜 비춘다고 생각한다. 거울 앞에서 내가 왼손을 들면 거울 속의 내 반영은 오른손을 든다. 우리는 이것이 거울이 가진 광학적 속성이 발현된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울에서 ‘좌우가 반전된다’는 인식은, 인간이 ‘뒤를 돌아볼 때 세로선을 축으로 하여 상체를 돌려 돌아보는’ 신체적 조건을 가졌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인식이다. 만약 인간이 고개를 뒤로 젖혀 (머리가 거꾸로 된 채로) 뒤에 있는 물체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신체 조건을 가졌다면, 거울을 보고 좌우가 반전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상하가 반전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지주의는 정신을 신비스런 과정이 일어나는 블랙박스로 보고, 신체와 환경은 블랙박스에 일정한 정보를 부과하는 ‘입력장치’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체화된 인지의 관점에서는 지각과 인지는 주변 환경과 인간의 신체적 조건과 상호작용하며 성립하는 것이므로 외부 조건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고려 없이 기술되고 설명될 수 없다고 본다.

 

V. 맺는 말: 정신의 소재(所在)

 

인식론의 고전적인 사고실험인 ‘통 속의 뇌(Brain in a vat)’ 논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통 속의 뇌 사고실험은 다음과 같은 가상적 상황을 상정한다. 나는 나 자신이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의 갖가지 사물을 보고 만지고 느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실재하는 것은 물통 속에 둥둥 떠 있는 뇌 덩어리이고, 여기에 컴퓨터로부터 정교하게 설계된 전기 자극이 들어와 내 육체가 실재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 내가 감각하는 세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저 전기 자극을 받는 뇌가 물통에 떠 있을 뿐이라는 진실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는 것이 통 속의 뇌 사고실험이다.

통 속의 뇌 논제의 인식론적 함의에 대해 정공법적인 논의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는, 이 가설에서 파생된, 가볍게 비튼 질문 하나가 책을 읽으며 떠올랐다. 그 질문이란 이것이다. 전기 자극을 주어 세계가 실재하는 듯이 착각하게 만드는 컴퓨터는, 성능이 얼마나 좋아야 할까? 인지주의, 즉 인간을 컴퓨터와 같은 존재로 보는 고전적 계산주의에서라면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과 같은 절차로 통 속의 뇌에 ‘착각’을 주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지가 단순한 신경 단위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이면서(연결주의) 동시에 신체와 그 신체를 둘러싼 환경의 상호작용이라고(체화된 인지) 보게 된 지금이라면 통 속의 뇌에게 제공할 착각의 설계는 인간 신체와 그를 둘러싼 세계를 통째로 설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Written by 이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