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설계도 – 켄 하이트, GURPS 호러, 도서출판 초여명, 2015.

I. 소개

GURPS 호러는 TRPG 룰북으로, 미국 스티브 잭슨 게임스의 GURPS를 지원하기 위해 출간된 보조 자료집이다. 즉 이 책은 GURPS로 TRPG를 즐기는 게이머들 중 호러(공포) 장르를 게임에 구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게임 책이다. 기본적으로는 호러 문학, 만화, 영화 등에 나오는 괴물들을 비롯한 갖가지 공포 요소를 게임용으로 수치화하여 실어 놓는 것이 이 책이 수행하는 주된 기능이라고 하겠다.

 

GURPS는 전통적으로 철저한 장르 분석을 장기로 삼아 온 TRPG 시스템이다. 던전 판타지, 서부극, 우주 활극 등 각종 대중문화 장르를 TRPG에 구현하기 위한 자료가 꾸준히 출판되어 왔으며, 그 진지하고 부지런한 고증과 장르의 정수를 분석하는 통찰 면에서 업계에 경쟁자가 없다는 평가를 늘 들어 왔다. 영문판 GURPS Horror는 1987년에 초판이 나온 (GURPS 제품군 가운데) 고전 중의 고전으로, 한국어판 GURPS 호러는 2011년에 나온 제 4판 Horror의 번역본이다.

 

TRPG 전문지가 아닌 본지에 이 게임 책의 서평을 기고하는 것이 다소 엉뚱해 보일 수 있지만, 이 책에 담긴 진지하고 철저한 장르 분석은, TRPG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호러 장르 일반의 팬에게 어필할만한 보편성에 도달했다고 본다. 본 서평은 이 책의 여러 측면 중 TRPG 애호가가 아닌 사람들도 흥미를 가질 법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II. 상징으로서의 괴물

 

호러 픽션에는 여러 종류의 괴물이 나온다. 좀비, 뱀파이어, 에일리언, 유령, 악마, 아몬드 눈을 가진 잿빛 외계인, 깊은 바다 밑에서 잠자고 있는 고대신. 이런 괴물들은 제각기 다른 기원과 전승을 가지고 있다. 유서 깊은 괴물일수록 여러 작가들의 손에서 재해석되어 작품마다 다른 성질을 지니게 된다.

 

유서 깊은 고전적인 괴물들을 작품 속에 등장시킬 때, 작가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왜 또 이 괴물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왜 이 이야기에는 좀비가 등장해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왜 뱀파이어가 나오는 이야기여야 하는가? 그토록 많은 작품들에서 변주된 낡은 소재를 왜 이 작품에 다시 등장시키는가? 식상하지 않은가? 진지한 작가라면 이 질문들에 자신의 대답을 마련해 놓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고전적인 소재 안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작가들이 그것을 반복해 사용해 왔다고 보며, 고전적 소재를 재해석할 때는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라고 권장한다.

 

예를 들어, 뱀파이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검은 망토를 두르고 외국 억양으로 말하는 것인가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박쥐로 변신해서 밤에 날아다니는 것인지? 재미있기는 하지만 핵심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인류로부터 소외되어 영원히 사는 것인지? 자, 이건 그럴 듯합니다. 물론 인류를 사냥하는 삶의 위험과 낭만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뱀파이어 이야기는 대부분 섹스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p.57)

저자에게 호러 장르의 괴물이란 인간이 가진 공포와 욕망의 상징이다. 예를 들어 뱀파이어는 오염에 대한 공포의 상징으로, 죄, 이방인, 죽음, 전염에 대한 인간 사회의 두려움이 응축된 소재이다. 그리고 이 소재를 존 폴리도리, 브람 스토커, 앤 라이스라는 각 시대의 위대한 저자들이 자신이 살았던 시대상과 결합하여 매번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저자는 괴물이 공포와 욕망의 상징이라는 규정에 근거하여, 14가지 공포의 유형들을 제시하고 (‘오염에 대한 공포’,‘자연에 대한 공포’,‘광기에 대한 공포’,‘기아에 대한 공포’ 등…) 공포 유형의 하위 범주에 40종에 가까운 고전적 호러 괴물들을 분류해 넣고 있다. 저자의 해석과 분류 체계에 동의할 필요는 물론 없지만, 자신의 해석을 내놓기 전에 호러 괴물에 대한 자신의 인상과 저자의 해석을 견주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III. 공포의 조건

 

누군가 호러 픽션을 통해‘공포란 무엇인가?’,‘사람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라는 문제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그에게는 이 책의 제4장이 특히 유용할 것이다. 통찰력 있는 호러 작가라면 이미 체득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방대한 참고 문헌의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세밀한 장르 분석은 누구나 음미해 볼 만하다.

 

저자는 호러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로 ‘불확실성’, ‘고립감’, ‘부자연성’을 거론하며, 이 세 요소가 모든 호러 이야기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토대 위에 다섯 가지 ‘스타일’(‘스플래터’, ‘펄프 호러’, ‘코스믹 호러’, ‘심리 호러’, ‘개그 호러’)과 네 가지 ‘주제’(‘배신’, ‘타락’, ‘투쟁’, ‘파멸’)를 배합하여 자신의 의도와 목적에 맞는 호러 이야기의 양식을 찾아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무대’, ‘피해자’, ‘악당’을 어떤 타입으로 만들고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조언이 실려 있어 공포 서사를 만들어내는 데에 직접적인 참고가 된다.

 

호러의 요소와 스타일, 주제 등을 단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도식적이지 않은가 하는 비판을 가할 수 있겠지만, 과하게 추상적이지 않은 도식성은 교조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않으면 독자의 이해를 돕는 큰 이점이 있다. 이 책이 게임에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실용서라는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IV. 마무리

 

공포는 사람들이 꺼리고 피하는 것이지만, 어떤 때에는 사람들이 거기에 매혹을 느끼기도 한다. 아마도, 인간 종의 삶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거의 항상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렇기에 두려움이란 인간 종에게 가장 강력한 감정이었으며, 때로는 두려움이 현실이 된 이야기를 대리체험하여 그 감정을 정화(catharsis)할 필요가 있었기에, 무서운 이야기를 짓고 즐기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감정을 서사로 구현하는 것을 돕는 충실한 가이드이며, 꼼꼼히 살펴볼수록 얻어갈 점이 많은 참고서이기도 하다. 호러 장르에 흥미가 있다면 TRPG에 관심 없는 독자라도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Written by 이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