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기억력, 좋은 편이신가요?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겁니다. 아주 오래 전 일어났던 일의 세세한 것까지 초 단위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제 일도 잘 기억 못하는 사람도 있죠. 저는 후자 쪽입니다. 요즘 들어서 그런 건 아니고 어릴 때부터 깜빡깜빡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마음이든 머리든 와 닿는 부분이 없으면 기억에 잘 안 남는 거죠. 특히 저는 성격이 좀, 호불호가 명확하지 않고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하는 면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저조차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타이밍에 갑작스럽게 마주치는 순간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다던가 하는 순간이겠네요. 오래도록 바라던 꿈을 이루던 순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만나던 순간.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지는 순간. 그 순간들 중 하나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와인 얘깁니다.

 

제가 몸 담았던 와인 수입사는 두어 달에 한번씩 월례교육을 진행했습니다. 본사 세미나실에서 새로 수입하기로 한 와인들을 시음하고 셀링 포인트를 배우죠. 저는 그 교육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운이 좋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와인을 종류별로 마실 수 있거든요. 한참 시음을 하다 보면 다들 얼굴은 벌겋게 – 발그레해지는 수준을 넘어서 정말 피나는 줄 알았습니다 – 익어있고 입술과 앞니가 검붉게 물들어있곤 했습니다. 교육 끝나면 고기 먹으러 가서 또 와인을 먹었죠.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시음을 하다가 마음에 드는 와인이 있으면 뒷풀이 자리에서 하나씩 챙기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만 그랬던 건 아닙니다. 아마도.

그 날도 그런 운 좋은 날이었습니다만, 여태까지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새로운 브랜드의 라인 별로 시음을 하는데 도대체 마음에 드는 와인이 없었습니다. 내가 맛있어야 남들한테도 자연스럽게 추천할 수가 있는데 그 포인트를 찾을 수가 없었죠. 게다가 하필이면 그 날 시음주로 선택되는 와인들은 하나같이 알코올 14도를 웃도는 진한 것들이었습니다. 주는 대로 계속 시음을 하다 보니 코와 혀는 이미 마비된 지 오래. 그 놈이 그 놈 같고 영 구분이 안 가 마지막엔 아예 포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날 마신 와인 중 딱 하나 기억에 남는 와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와인을 마실 때 가장 먼저, 또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레드와인 품종은 까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입니다. 줄여서‘까쇼’라고 부릅니다. 병충해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많이 재배되고, 그래서 생산되는 양도 가장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음식들은 대부분 마늘과 고추가 들어가기 때문에 맵고, 짜고, 시고, 자극적입니다. 까쇼 또한 맛과 향이 강하고, 묵직하면서 견고한 탄닌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 품종이기도 합니다. 어디 가서 와인 고를 때 가장 무난하게 먹힙니다. 웬만한 음식이랑 다 잘 어울리거든요. 만원 내외의 저렴한 가격대에서도 의외로 괜찮은 게 많습니다. 아무거나 골라도 기본은 한다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많이 볼 수 있는 품종 중 하나는 바로 까르미네르Carmenere 입니다. 까쇼와 좀 다른 느낌인데, 특유의 향신료 향이랄까요. 후추 향 같은 것이 나기도 해서 약간 취향을 좀 타는 품종입니다. 네. 사실은 제가 별로 안 좋아하는 스타일 입니다. 저는 방금 말씀 드린 까쇼처럼 좀 확실한 게 좋거든요. 제가 느낀 까르미네르는 뭐랄까. 처음 마셨을 땐 딱, 무슨 맛인지 잘 모르겠다, 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색깔도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아요. 레드 와인은 자고로 붉은, 검붉은 색이 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까르미네르는 일단 레드 와인이니까 붉긴 한데 묘하게 보랏빛이 납니다. 비주얼도 그냥 저냥, 향은 별로, 맛도 별로. 이게 제가 갖고 있던 까르미네르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그 와인이 바로 까르미네르 입니다. 좋아하는 와인을 마셔도 기억이 안 날만큼 취해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와인의 맛과 향은 아직도 제 머릿속에 진하게 남아있습니다. 달큰한 듯 하면서도 동시에 쌉쌀한, 아주 달지도 않고 아주 쓰지도 않은데 굉장히 매력적인, 문자 그대로 감칠맛이 있는 와인이었습니다. 시음주는 이미 다 마시고 없는데 코 끝에 잔향이 맴돌고, 입 안에서 깊은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노트에 뭐라고 썼냐면,‘달콤한 듯 쌉쌀한 듯 감칠맛 최고!! 대박!!’ 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제 좁은 시야가 또 다른 신세계를 만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웹툰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이 도시에 목숨의 위협을 받는 절박함은 없다. 맨 손으로 내 몸을 지킬만한 기술을 가지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고, 무기를 다루는 법을 실전에서 쓸만한 전쟁터도 없다. 하지만 우리들은 삶이라는 전쟁을 매일 치르고, 여전히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우리는 물질에 집착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연연하며, 정신적으로 나약하다. 우리는 치열한 사회를 살아갈 만큼 강하지 않아서 항상 좌절한다. 매일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매일 절망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 매일이 되고 매일매일은 곧 일상이 됩니다. 당장 뒤에서 쫓아오는 맹수는 없지만 걷고 있는 이 길은 마치 외나무다리 같습니다. 목표로 삼았던 지점은 멀게만 느껴지고, 일상은 점점 지겨워집니다. 스트레스는 쌓여만 가고 만성피로는 풀릴 줄을 모릅니다. 해소되지 못한 절망들은 점점 쌓여 안에서부터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현대인에게 우울증은 이제 마치 생활필수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아주 사소하지만 선명한 이런 순간들이 모여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정말 별 일 아닙니다. 그냥 기대도 하지 않았던 와인이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좋았을 뿐 입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진부하게 들릴 수 있지만 잠깐이나마 참 행복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맛있는 와인 하나 더 찾아서, 누가 와인 먹자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서 챙길 만큼 좋았습니다. 그 좋은 거 다른 사람들이랑 먹으니까 더 맛있더군요. 신나게 웃고 떠들면서 한 병 비우고 나니 조금은 덜 힘들고 덜 지겨워졌던 것 같습니다. 다시 돌아와 똑 같은 일상이 기다리고 있어도, 전보다 좀 더 여유롭게 받아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거면 됐습니다. 또 절망이 찾아오더라도, 아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어떤 순간을 가지고 계시는가요.

 

 

Written by 이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