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와 열정 사이 – 필리버스터 정국을 돌아보며 던지는 이야기들

1. 43년만의 필리버스터

 

사실부터 고하자면 모두가 열광했던‘마이국회텔레비전(이하‘마국텔’)’, 필리버스터의 서막을 생중계로 볼 수 없었다. 해외까지는 아니었지만 일신상의 이유로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도무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SNS에 올라오는 소식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건 지인들도 그렇고, 인터넷상의 열기도 뜨거웠다는 것. 헌데 SNS를 유령처럼 떠도는, 시선을 사로잡는 자극적(?)인 기사가 있었으니.“43년만의 필리버스터”가 바로 그것이었다.

 

2. “내 인생 최초의 필리버스터”

 

20대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의 경제민주화라는 선거 전략에 따라 뜨거웠던 필리버스터는 막을 내렸지만, 당시 SNS를 횡횡하던,‘마국텔’을 시청하는 시민들의 반응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딱 이것이었다.“내 살아생전에 국회에서 필리버스터를 보게 될 줄이야!”그리고 당연히 여기에는 연일 경쟁적으로 기록갱신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언론기사가 한 몫하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무려 43년, 그러니까“1973년 이후로 폐지된 필리버스터 제도가 지난 2012년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되며 부활했다”는 것이 언론의 논조였다. 그럴 리가?

하나씩 차근차근 이야기하자면, 우선 언론이 이야기한대로‘필리버스터’제도가 폐지된 적 자체가 없다. 제4차 국회법 일부개정

(70.12.31, 법률 제2243호)와 제5차 국회법 전부개정(73.2.7, 법률 제2496호)를 비교해보면‘동법 제4절 발언’의 제97조(발언시간의제한)①에서“발언시간은 국회의 의결로 제한할 수 있다”에서“발언시간은 30분을 초과할 수 없다. 다만, 의장은 15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1회에 한하여 연장을 허가할 수 있다”라고 변경된 것이 전부다. 물론 법조계 등은 이를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했으며, 명백히 이는 군부독재 시기의 잔재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중요한 건 국회선진화법 이전에 국회에서‘필리버스터 제도’를 둔다고 명시적으로 법률에 기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필리버스터 제도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미 상원 역시 법률 어디에도 이러한 제도가 있다고 적시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프랑스 의회 등 대부분의 나라는 아예 장기간 발언을 인정하지 않는다. 허면 이들 나라에서 필리버스터가 없었느냐?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필리버스터는 법률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다수당이 민주주의 일반원칙을 위반하고 논의나 합의 없이 다수결로 악법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소수당 의원들이 할 수 있는 관습적이고 적극적인 입법 방해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곧 다시 논의를 하도록 하고 그래서 우리가 아는‘마국텔’이전에, 국회선진화법 이전에 필리버스터가 단 한 번도 없었느냐 하면 답은 당연히“그렇지 않다”이다.

국회선진화법 제정 이전에도 지난 2011년 5월에 한·EU FTA 체결을 반대하며 진보정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 시도가 있었고, 인터넷 검색이 허락하는 가장 멀리까지 가보자면 적어도 1990년 3월부터 그 한 해만도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 시도가 수차례나 계속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언론 역시 이들 야당 의원들의 입법 방해 행위를“필리버스터”라는 이름으로 각종 부연설명을 덧붙여 열심히 설명했음을 물론이다.

그러니까 최소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1990년도부터 2011년도 사이에 이미 세상에 태어나 있었다면,‘마국텔’이 여러분의 첫 번째 필리버스터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럼 발언 시간도 제한되어 있고, 무제한 토론 규칙도 없었는데 대체 무슨 수로 필리버스터를 했다는 걸까? 농담이 지나친 게 아니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분들을 위해 당시 국회의원들이 취했던 방법을 알려주자면, 본회의에서 집단적으로 의사진행발언 등을 신청하여 회기가 끝날 때 까지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법을 주로 애용하고는 했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1973년에 의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군부독재 세력이 발언시간에 제한을 뒀다는 것과 이게 문제라면 국회선진화법이랍시고 요란을 떨게 아니라‘무제한 토론’이라는 옥상옥 대신 종전과 같이 발언시간 제한을 철폐하기만 하면 됐을 일이다.

또 언론의 행태 역시 문제가 많았다. 지금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들 중에는 어제 막 입사한 신참들도 있겠지만 연륜이 있는 소위‘대기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텐데 어째서 이번 필리버스터를 놓고 천편일률적인“43년 이후 최초의 필리버스터”라는 말을‘우라까이’하며 기사를 양산해낸 건지 의문이다. 언론이 전하는 진실이 대부분의 시민들에게‘진실’이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최초”니“기록갱신”이니 하는 자극적인 수식어를 남발하는 언론의 모습은 분명 무책임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마이국회텔레비전’의 스타들, 하지만

 

이번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여야 국회의원들은 각자 자신의 처신에 따라 손익계산을 달리하게 되었다. 가장 널리 이름을 알린 건 역시 은수미, 정청래 의원이지 않나 싶다. 한편 필리버스터에 참여하고도, 안 하느니만 못 했기에 오히려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히고, 동성애 혐오 발언으로 화룡점정을 찍은 박영선 의원도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그 밖에 김광진, 김제남, 신경민 의원 등 인구에 회자되는 이름이 여럿 있지만 그것보다도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아까 우리는‘마국텔’이 여러분 인생의 첫 필리버스터가 아니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국회의원은 세금도둑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법안과 민생도 팽개치고 밤낮없이 골프나 치러 다니는 족속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마국텔’을 통해 여러분이 보았던 그 모습은 대부분의 야당 의원들이 평소 본회의장에서, 혹은 상임위원회에서 하던 대로 한 것뿐이었다는 걸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무 뜻밖의 이야기라 선뜻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또 물론 준비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건‘평소처럼’그저 열심히 준비해서 열변을 토한 것뿐이라는 얘기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만, 이제‘마국텔’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테니 지난 회의록이나 영상을 다시 보길 권하고 싶을 따름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국회의원들에 대해 불신감을 느끼고 있다. 아니, 우리뿐이겠는가? 전 세계적으로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불신은 하늘을 찌르는 수준인 듯하다. 하지만 바로 그 냉소, 우리 주변을 흐르는 냉소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기술적으로 입법부는 행정부를 견제하고, 입법부는 유권자, 즉 시민인 우리들에게 견제 받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건 이론일 뿐이라며 냉소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시민이 입법부를 견제한다는 건 비단 이제 한 달 여 남짓 앞으로 다가온 투표시기에 표를 행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가‘마국텔’을 시청했던 것처럼, 보고, 느끼고, 평가하고, 토론하는 것. 그리고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견제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냉소하는 것만큼은 국회의원들이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잘 모르지 않는가? 그리고 바로 그게 그들이 계속 미친 짓을 하고 다닐 수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당신이‘마이국회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눈 여겨 본 국회의원 누구라도 좋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평소에 관심 있게 지켜본 이가 있다면 그것도 좋다. 필자의 경우, 비록 이번 필리버스터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장하나 의원이 바로 그런 케이스이다.

누구라도 좋지만, 중요하고, 또 확실한 한 가지는 다시 의회로 들여보내야 할 괜찮은 국회의원 후보가 이들이 처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해보자면, 17대 국회에서 등록금 문제로 스타가 되었던 최순영 의원이나, 론스타 문제와 장병 임금 인상을 주도 했던 임종인 의원, 18대 국회 때 삼성의 순환출자 구조 개편을 위한 삼성생명 상장을 단독으로 반대했던 유원일 의원이나 청소부 출신 홍희덕 의원 등. 아시다시피 이들은 지금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뉴스에도 이름 한 줄 올라오지 않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괜찮은 사람, 의회 안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마국텔’의 스타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 당신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흡사 우리 모두가 이번이 최초의 필리버스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Written by 박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