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정치: 그들의 불안은 어떻게 우리의 불안이 되는가

 

1.  공동체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

 

윤석열의 불안: 대통령이 꼭 되어야 한다!

정·재계에서 이른바 ‘건진법사’로 불리는 무속인이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민의힘 측은 ‘건진법사’로 알려진 전모(61)씨가 무속인이 아닌 ‘대한불교종정협의회’ 기획실장이라고 해명했다. 이 단체는 과거 가죽을 벗긴 소 사체를 제물로 바치는 행사를 주관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전력이 있었다고 한다.1)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의 남다른 대선 행보는 널리 알려졌던 상황이었다. 윤석열 선대위 네트워크 위원회 및 코바나 코퍼레이션의 고문을 담당하고 있었던 건진법사 전모씨가 ‘일광조계종’이라는 무속과 불교 사이 그 무언가에 속해 있다고 하는 종단(?) 또는 종파(?)를 설립하여 윤 후보에게 일정 정도 영향력을 미친 것도 드러났다. 건진법사는 불교의 성직자라기보다 만신, 즉 남자 무당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종파의 구분이 무엇이 중요할까 싶지만 말이다.

건진법사는 무속에서 트랜스를 뜻하는 ‘신내림’을 통해 그의 말이 같은 권위의 근거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후보의 손바닥 ‘왕(王)’자 부터, 이 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려는 껍질이 벗겨져 쇼크사한 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의 행위는 전통적이면서도 낯설며, 미스테리하면서도 혐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보이게 한다.

결국 윤석열 후보의 정신적(!) 지주로 보이는 건진법사 전모씨가 소속된 선대위 네트워크 위원회는 해산 절차를 밟았지만, 그의 대선행보에서 ‘특이한 행보’에 많은 영향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윤석열 캠프와 관련 있는 종교단체(?)에서 이러한 의례를 행하는 이유는 사실상 이기지 못할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불안이 행동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행위들은 ‘그냥’ 또는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윤석열과 관련되었다 생각한 사람들의 의례는 ‘무엇인가 바라는 바대로 되지 않을 때의 문제’이다.

희생제의는 사람(들)이 희생물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 무엇인가 바라는 것을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희생물의 처리는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정해진 방식으로 죽이는데 의미가 부여된다. 희생물을 죽이는 방식이 엄격하고 신속하게 진행된다는 특징이 있다. 희생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 아닌 목을 베고 피를 뺀 고기를 대상에게 바치는 순으로 진행된다. 희생물로 사용된 소의 고기를 바치는 것이지, 소의 고통을 바치는 것과 다르다. 희생물로 사용된 소를 빨리 죽이는 것도 아니고, 소의 고기를 신적대상에게 바쳐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닌, 소의 고통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주술성을 획득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들의 희생제사가 그들이 바라는 바에 따라 근거를 갖추게 되는 요소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들 공동체 스스로 이번 대선에서 불안한 것이 많았다고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집중할 지점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문제가 아니라, 바라는 일이 꼭 이루어질 수 있도록 어떤 행동을 하는가이다. 개인의 불안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지만, 공동체의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나 낯설고 폭력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쉽다.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 자들의 불안이 소의 껍데기를 벗겨 죽여야 할 만큼 절실하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불안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행동들은 너무나 쉽게 주술과 합리라는 이름으로 구분 지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구분하고 믿는 사람에 따라 너무나 쉽게 구분되고, 또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로 쉽게 확장이 되고는 한다.2) 따라서 현대 사회의 무속과 다수의 사람이 믿는 이른바 ‘메이저 종교’의 상관성과 영향력에 따른 편 가르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른바 ‘주술’의 영역이 지금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정치상황과 맥을 같이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주술-합리로 그들의 행위를 분석해서 편 가르기 하는 게 아닌, 그들이 지금 그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어떤 불안을 이야기하는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2. 그들의 불안은 우리의 불안이 된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정한 종교성 또는 정치성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 간의 의례들이 서로 이해되지 못한 상황에서, 다수의 사람이 소수의 ‘주술적’ 의례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점이다. 단순히 ‘주술적’이기에는 너무나 정치적인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적인 행위를 주술적인 행위로 바꾸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을 제보한 미디어일 확률이 높다. 미디어라는 증폭기는 한 사건을 다양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할 확률도 있다. 보도를 통해 전해진 기자의 생각은 일정한 생각으로 형태 지는 까닭에, 그것을 읽는 독자들이 쉽게 현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희생된 소에게는 굉장히 미안하지만, 껍질을 벗기는 행위의 징그럽다-안 징그럽다 도식을 넘어야 진짜 문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무슨 의도로 이들이 이런 행위를 하였는가? 이런 문제를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을 망각시킨다.

우리에게 목적과 의도가 불분명한 의례만큼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없다. 여러 신종교의 의례들이 신비화되거나, 특정 의례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경우, 그 의례에 담긴 의미보다는 그 의례를 통해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에 집중하도록 하는 특징이 있다. 풍년제와 풍어제와 같이 풍요를 기원하는 여러 의례에서 수많은 짐승들은 도살되어왔고, 그것을 잘못했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개인적으로 치러지는 굿을 포함하여 짐승(정확히는 가축의 고기)들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사용되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 비판하는 경우는 의례를 치르는 의도와 현재적 맥락에 따른 의례 행위가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에 비판받아왔다.

모두가 바라는 바를 기원하는 것과 그들만이 바라는 것을 기원하는 것은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 박근혜 정부에서 오방색을 사용하고, 국가 단위로 치러진 여러 행사들이 비판받은 것도 그러하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 아닌, 특정 정치집단의 바라는 바(또는 그들이 불안해하는 그 무엇인가)를 너무나 그들만의 방식으로 기원했기 때문에 공감받지 못하고 비판받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의례와 ‘정상적인’ 의례를 판단하는 것은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의례 참여자들이 그것을 믿고 행위로서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고자 하는 바(불안을 포함하여)를, 그게 무엇인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렇게 해서라도 집단의 결속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정확하다. 불안을 없애고, 만약 실패하더라도 그들의 공동체는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의 불안은 그들의 불안을 없애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사실상 이러한 문제들이 크게 건드려질수록 다른 문제들은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거나, 이상한 점이 크게 부풀려진다. 그들의 의례는 왜 문제가 될까? 그들의 불안을 없애려는 의도로 인해 그들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제가 될 일들을 ‘저런 식으로’ 결정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정책적인 결함을 없애기 위한 공동체 내부의 문제인데, 그들의 공동체 바깥에 존재하는 우리는 소의 고통과 함께 다가온 불안에 쉽게 휩싸여버렸다.

3.  정치의 문제는 불안으로 해소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지금을 살아간다. 나 또는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방식들이 정치라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정치’ 해야 할까? 민주주의의 특성상 정확한 문제 인식과 그것을 해결하고 누구나 평등하게 주어질 정책들을 굉장히 많이 고민해야 한다. 지난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정책이 만들어지기는 쉬워도 삭제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따라서 정책의 문제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당대의 문제점들이 어떻게 해결되는가에 대한 맥락이 중요하게 고려되는 탓일 테다.

막연한 의례들은 막연하기 때문에 외면받는다. 왕조시대의 희생 제사는 그것을 통해 여러 문제를 국왕의 권위를 높여 다른 불만을 잠재우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방식이 실제로 존중받았다. 하지만 2022년 현재 우리의 삶은 누구보다 치열하고, 또 위협에 직면해있다. 누구에게 권력이 집중되는가의 문제가 아닌,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는 권력을 통해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의 문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걱정거리가 하나 추가되어버렸다. ‘국정을 주술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해버리면 어쩌지?’라는 문제 말이다. 소위 ‘정치’라는 방법을 통해 우리 삶의 문제가 여전히 이러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우리가 행사해야 할 권리는 그 어디론가 추방되고 있음을 더 무서워해야 하지 않을까?

주술을 통해 얻은 자본을 통해 또 주술을 낳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불안을 통해 얻은 자본으로 또 다른 불안을 만들어 낸다는 것. 이게 그들의 의례가 주는 진짜 문제이다. 과거의 생산수단이었던 소는 또 현재에 와서 그들의 불안을 없애기 위한 생산수단으로 바뀌어버렸다. 다음 껍질이 벗겨질 대상은 누구일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또 불안과 불안 사이를 맴돌고 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의례를 통해 이루어질 일은 희박하지만, 그들의 의례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이렇다. 단순히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그 무엇인가가 단순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그들이 주는 낯섦을 넘어서야 한다.

 

 

Written by 이민기

 

1)  (노컷뉴스https://www.nocutnews.co.kr/news/5691537)

2)  2022.2.2. 노컷뉴스 “신학자 28인 “대선이 주술에 휘둘려”…사실상 윤석열 공개 비판”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2020215312518630&utm_source=naver&utm_medium=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