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 상상하기: 우리로서 존재하기

본 글은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글(아르준 아파두라이, 차원현 역, 「전지구적 문화 경제에서의 탈구와 차이」, 『고삐 풀린 현대성』, 현실문화연구, 2004, 51~87쪽.)의 글에 대한 비평문입니다.

 

0.들어가며

사뭇 뜬금없는 이야기로 시작하고자 한다. 필자가 초등학생일 당시, 기독교를 믿고 있었던 우리 가족은 추석마다 ‘추수감사 추모예배’를 드렸다. 필자의 어머니는 추모예배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화를 내시면서도 누구보다 빨리 할머니 댁에 가셔서 준비를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교회의 전례상 추수감사와 추석은 굉장히 큰 시간적 간격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토속음식이 곁들어진 ‘전통적인’ 제사음식과 교회 목사님을 초대해 설교를 듣는 풍경이 벌어지고는 했었다. 목사님의 영어 섞인 설교는 가족들의 ‘아멘, 아멘!’이라는 화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본어 어휘가 섞인 한국어로 할머니와 목사님과 대화를 하셨다. 1990년, 전라남도 서쪽 끝, 중산층 기독교 신자 가족들의 일상이었다.

 

  1. 질서와 강도

현재는 SNS를 비롯해 여러 인터넷 플랫폼을 활용한 담론들이 초 단위의 공유가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 대통령의 혐오 발언에 대해서 핸드폰만 열면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서, 기술의 이동과 그 혁신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빨라졌다. 집 안에서도 정확한 소통을 위해 카카오톡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거나 들으면서, 개인적인 친밀성이 높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고 그렇다고 소통을 안하는 것은 아니었던 현재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물론 카톡 등 스마트폰 채팅 플랫폼이 주는 일종의 ‘대화의 장’으로서 역할은 상호작용에 있다. 하지만 그 사용 및 사용자가 노출된 것은 한국인들에게만 친숙한 면이 더 크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한국인들은 SNS 및 소셜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국내의 사정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지만 국외의 사실을 알기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사람들의 공감이 되지 않는 이상에야 여러 언론매체에서 보도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결국 회자된다. 여러 사실을 알게 되는 경로는 사실 메이저 언론이나 누군가 공유하여 화제가 되어야만 확산된다. 더불어 관공서에서 몇 시간이 멀다 하고 울리는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의 긴급 메시지는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사실 메시지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방식의 변화는 이루어졌지만, 그 변화도 기존에 사용하고 있었던 상황들에 빈도만 늘었을 뿐이지 궁극적인 변화는 약간 미미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이나 논의되어야 할 여러 중요한 사건들은 누군가 보도를 해야만 알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그것들을 가져오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가장 적합한 설명 대상으로는 음악과 미술, 특히 패션이라고 본다. 이른바 영향력 있는 디자인 하우스들이 시즌별로 내놓는 디자인에 따라 동대문과 여러 국내 의류업체의 디자인이 바뀌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물품뿐 아니라 거기에 동원되는 색깔에까지 ‘누군가가 가져오는 세계화’의 틈은 보이지 않게 풍경을 바꾼다. 더욱이 재미있는 지점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용되었던 디자인들의 변용이 한국으로 와서는 그에 맞게 변화된다는 점이다. 한국의 의류업체 디자이너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디자인이라는 형식적(아파두라이 식으로 말하자면 경관적) 근거를 동원하여, 현재 유통되는 한국 의류시장에 맞는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류들은 유명 브랜드의 디자인과는 다르다. 유명 그 브랜드를 사용하고 싶지만 사용하기에는 부담을 느끼는, 문화적인 계급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브랜드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한국의 소비자에게 맞게끔 재해석하고 바뀐 물품을 구매하는 사람들 간의 어느 정도 격차는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제품들은 일종의 상상력, 즉 그런 ‘스타일’-‘북유럽 스타일’, ‘명품 스타일’, ‘스위스 스타일’ 등등의-을 사용한 것들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개인들은 그것들을 소비하여 자신의 일상을 어느정도나마 변모시킨다. 이러한 패션(또는 복식)의 면모는 비록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과거와 현재에도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1. 동질화와 이질화의 긴장

「전지구적 문화 경제에서의 탈구와 차이」의 저자인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동질화와 이질화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아파르두이는 얼핏 듣기에 ‘동질화’와 ‘이질화’라는 다소 상반되는 개념을 통해 우리 주변에 있는 문화적인 현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는 ‘세계화’가 미국 중심의 문화제국주의적 혐의를 짙게 가지고 있다는 시각에서 출발해, 세계화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현재 문화적 현상의 분석을 시도했다. 조금 더 풀어보자. 무엇이 미국과 비슷하게 변하고 있으며(동질화), 무엇이 미국과 다른 것일까(이질화)? 비슷한 것과 비슷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 세계적(또는 미국적)인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는 지금의 현상에 대해 분석을 시도할 때, 보통은 계급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역사적인 개념, 즉 전쟁과 외교 그리고 이것을 통한 결과로서의 여러 가지 변화는 이런 것들을 더 알기 쉽게 해준다. 아파두라이는 이런 모습을 잘 살펴보기 위한 그만의 분석 기준을 만들었다. 그것은 스케이프(scape) 개념이다. 1) 뒤이어 설명할 다섯 개의 스케이프(풍경) 개념은 어떠한 가치를 중심으로 두면서 문화적인 현상을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아파두라이의 고민이 담긴 것이다. 언뜻 보기에 다 같은 일상과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스케이프지만, 여행을 하거나, 자기가 살던 곳에 의도치 않게 갔을 때 보이는 모습들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름의 모습대로 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스케이프’ 개념은 과거에도 그러했다. 비록 동양이 서양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서로에게 소식을 알리기 위한 의사소통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지금보다는 현저히 느렸다. 서로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한국은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위치해 있었지만, 그에 비해 지방과 그에 대한 통제의 방법들은 그들이 말하는 ‘국제적인’ 방법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의 환경을 알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으나 고려와 조선의 경우가 이와 비슷한 사례다.

고려의 경우 당시 송-거란으로 양분된 중국의 정세에 따라 누구에게 신하를 자청할 것인지가 큰 외교 사안이었다. 때문에 그곳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한 다양한 외교정책을 벌였다. 중심부를 자처했던 거란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따르지 않는 고려와 전쟁을 벌였다. 그때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통한 상호작용은 약 100년 동안 대치상태에 이르렀다.2) 이후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거란의 시간적 바탕 위에 자신들의 시간들을 계산했다. 전통사회는 연호의 사용과 조공국이 책봉국의 군주를 자신의 정치적 시스템에 위치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런 부분은 거란의 문화적인 요소를 중점적으로 고려의 문화를 바뀌어 나갔던 ‘고려 문화의 거란적 동질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사회 내부에서는 그 조공국이 거란에서 금[여진]으로, 금[여진]에서 원[몽골]로 바뀌는 와중에도 철저히 고려적인 것, 즉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통제하는 논리가 바뀌었다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귀족과 왕실이 추구하던 문화적인 논리는 그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세금의 수취와 그것을 통한 경제적 교류인 파이낸스 스케이프(경제적 경관)는 놀랍게도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통용되고 있었다. 이와 반대로 그들의 미디어 스케이프(미디어적 경관)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의례의 거행이나 정부 혹은 왕실에서 설행하는 종교적 행사는 때때로 바뀌고,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이 요나라 장종의 불교 이해를 옹호하는 식의 국제적인 상호과정에 힘입었다. 이러한 스케이프들은 유교적인 수사와 불교적인 의례, 나아가 그 의례들이 한 권력집단에서 쓰이는 예전의 모습을 벗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전에 없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그들이 한 번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데오 스케이프(이데올로기적 경관)를 보여주는 데에 이르렀다. 그것은 ‘사회를 유지하는 공동체의 도덕적 원천의 독점’으로부터 비롯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가 있지만, 내부집단과 이상적인 국가의 완전한 일치를 단순하게 또는 다양한 방법(이를테면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대한 추모나 위령을 통한)으로 기억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한 재현을 통해3) 국가적인 이미지를 재생산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국가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도덕적 가치를 지키려 애를 쓴다. 그와 반해 정치적·경제적·미디어적인 측면에서는 과거로부터 내려져온 가치들을 끊임없이 바꾸어나가거나 계급 간의 분리를 실행하고 있다. 즉 분열과 통합의 모순은 지속적으로 언어나 생활 모습을 바꾸어줌으로써 차이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12세기 초반의 민란들이 보여주는 성격들에서도 이런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지난 역사연구에서는 각 계급별로 처한 어려움에 따라 일어난 만적의 난 또는 망이 망소이의 난과 같은 크고 작은 민란들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취급’해 왔다. 그들에 대한 『고려사』의 서술은 그것을 재편집한 조선 사람들이 보기에도 권력 집단들이 만든 이데오 스케이프(이데올로기적 경관)의 붕괴에 대한 경고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많은 공권력이 동원되었다.

 

  1. 기계예술 시대의 복제 작업4)

서문에서 언급했듯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문화적인 배경에서 벗어나거나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문제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문화적 재생산이라는 이름으로 논의되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과 같은 전통적인 공동체는 전통적인 장소에서 자신을 재생산하며 자연스럽게 문화적 형식 자체를 재생산한다. 이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 즉 급격한 변동의 시기에 문화 적응을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가족관계로 예를 들어보자. 부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자식들이 낯선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되돌아오게 되면 가족관계는 불안정한 성격으로 바뀐다. 새로운 상품 패턴이 나타나고 부채와 의무가 재조정되며, 새로운 환경에 대한 온갖 소문과 환상들이 현존하는 지식과 실천의 레퍼토리 속으로 끌려 들어가진다.

이러한 작업들은 과거 조선시대에서도 『삼강오륜행실도 언해』나 현재의 사랑을 전제로 한 관계들을 정의하는 방식들, 그리고 새로운 가족에 대한 정의들을 통해 문화적 재생산 작업으로 표방된다. 전통들은 계속 발명되어지고 사람들은 계속 새로운 형식을 찾아간다. 부르디외가 말한 ‘욕망의 선택’의 결과로서 일정한 아비투스라기 보다는, 이데오 스케이프를 맞추기 위한 전략, 즉 어떠한 문화적 체계 안에서 정의하지 못하는 관계들을 정의내리거나 부정하는 등의 문화적 실천이 그러하다. 우리 안에서는 전통적 가정폭력이나 여성 문제, 다문화 가정 및 성소수자의 결합문제들이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디어는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반영할 뿐이지,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는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장악하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영향을 주려고 한다. 그것은 성과 폭력의 장치이다. 폭력을 우아하게 만드는 것, 여성들의 정조를 문화적 재생산이라는 안정적인 체계의 보강재로 만드는 일들은 결국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는’ 남성 공동체를 위한 대리인을 위해 기능한다. 나아가 이상적인 가족의 형태와 그에 딸려 있는(어쩌면 반대로 이야기하는 게 더 옳은) 자본과 기술의 향유는 각 이데올로기 집단이 지니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을 재현하게 하려는 일종의 전략인 것이다.

 

  1. 전 지구적인 문화형성의 형태와 과정

‘그들의 문제는 그들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말처럼, 아파두라이는 ‘문화적 형식의 배치를 근본적으로 프랙탈5)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인간의 문제는 일정한 수식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끊임없는 분리되는 흐름들 가운데 기초한 전 ‘지구적인’ 문화적 상호작용의 이론이, 기계적으로 무엇인가 계산하기 위한 기호로 이루어진 생각들보다 훨씬 큰 힘을 얻기 위해 ‘카오스’ 이론을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즉 ‘옛날에도 그러했으니 지금도 그러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프랙탈적’인 형태들로 설명하고 싶겠지만(또는 그렇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구성되는 힘의 관계가 어떤지, 우리 삶이 어떤 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해진 일종의 패턴으로 인문학, 특히 역사학에 부과되었던 인과성과 우연성, 예언적인 측면이 강했던 성질들에 대한 반기이다. 그것들은 그 상황에 있었던 일에 대한 해결일 뿐인 것이다. 그것들이 해결되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생각들의 변화와 의미들은 그때의 최선이거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흐름이었다. 권력 구조에 대한 이해나 또는 그에 대해서 글 쓰는 방식 역시 한 가지 사실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 혹은 한 가지 분석 틀로 모든 것을 설명하자는 일종의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역사 혹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문학적 분석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바뀌어왔고, 그때의 사람들은 그때의 세계관에서 살아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스케이프’들은 바뀌었고 그것을 이루는 역학관계는 ‘분명히’ 바뀌었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듯이, 아직 이전의 ‘향수’에 존재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며 변화를 외치는 사람이나, 현재의 편안함을 향유하면서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들, 또는 그 안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학자는 어떠한 작업부터 ‘대담하게’ 시작해야 할까? 사실 끊임없는 분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리에 앞서 현재의 상황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인류학이든 역사학이든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술에 기댄 예언가가 아닌 이상에야 황금양털의 신탁6)과 같은 담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공동체는 무엇과 결별해야 하고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을까? 공동체는 어떠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느냐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의 공동체를 우리의 힘으로 오롯이 서 있게 하려면 어떠한 생각들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Written by 이민기

 

1)  아르준 아파두라이, 차원현 역, 「전지구적 문화 경제에서의 탈구와 차이」, 『고삐 풀린 현대성』, 현실문화연구, 2004, 61~62쪽.

2)  고려와 거란에서 대표적인 외교문제는 보주(지금의 의주)를 둘러싼 각장(현재의 여진인이 대상이 된 노동력 시장) 설치 문제와 그에 따른 양국 조정들의 서신 교환문제였다. 보주의 영유권이 누구에게 있냐는 문제였는데, 이 문제는 요가 금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 다.

3) 고려에서는 초기 통일 전쟁 당시에 신숭겸과 김락이 왕건을 대신해서 전사한 일이 있었다. 이후 고려 예종은 국가적인 위기, 즉 거란에서 여진으로 중국의 주도세력이 바뀌고 송 왕조마저 남쪽으로 밀려가고 있을 때 국가적인 충성을 고양시키기 위해 ‘도이장가’라는 향가를 짓고, 팔관회 때 그들의 자리를 설치해놓아 그들을 추모하게 했던 정황이 있다.

4)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길, 2007. 아파두라이는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뒤집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이 글에서 새로운 현대의 기술이 어떻게 전통적인 예술 개념(의식에서 정치로)을 전복시키는지와 기술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에 대한 충실한 모사로서의 영화에 주목한다. 이때 나오는 그 유명한 개념이 ‘아우라’이다. 아우라는 예술의 원작이 갖는 신비한 분위기나 예술의 유일성을 말하는데, 이때 붕괴하게 되는 것은 엄숙하고 기득권이 향유하는 소수의 종교적 가치나 의례적 가치이며, 사진기술의 발달을 통해 그것들이 전시적 가치로 변화하여 예술의 대중성을 이끌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기술에 염두해둔 집단의 정치적 행동에 중심을 두고 있다. 아파두라이는 아우라의 파괴를 통해 오히려 예술작품 원본의 가치가 더 올라가듯이, 전통적인 공동체의 결별(disjuncture)과 그로 인한 변화가 새로운 에스노 스케이프(민족적 경관)를 창출하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더 던져야 한다고 비틀어 말한 것으로 보인다.

5)  프랙탈은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를 말한다. 언제나 부분이 전체를 닮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소수(小數) 차원을 특징으로 갖는 형상을 일컫는다. ‘프랙탈’이란 이름은 1975년 B. B. 만델브로에 의해 지어졌으나, 이러한 형상들에 관한 추상적 논의는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6)  프랙탈은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를 말한다. 언제나 부분이 전체를 닮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소수(小數) 차원을 특징으로 갖는 형상을 일컫는다. ‘프랙탈’이란 이름은 1975년 B. B. 만델브로에 의해 지어졌으나, 이러한 형상들에 관한 추상적 논의는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