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위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2018년 3월 5일, 김지은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했다.1) 미투(#METOO) 운동이 들불처럼 퍼지던 시기였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김지은과 함께하는 사람들 등을 비롯해 김지은을 지지하는 연대자들은 ‘위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형법 제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피감독자간음죄)에 대한 연구와 토론, 분석과 비판이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가해자 측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여론 조작, 언론의 무분별하고 왜곡된 보도로 인해 심각한 2차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1심은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하지 않았다”라는 비상식적인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은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인정하며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다. 3심은 피고인과 검사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김지은입니다』는 김지은이 용기 있게 미투한 후 안희정에 대한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554일간의 기록이다.

 

김지은은 “이 글을 쓰는 것은 나의 경험을 피해자의 언어로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김지은의 언어로 기록된 554일간의 투쟁에는 그녀와 함께 싸우고 분노하고 괴로워하고 성장하고 연대해온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도 녹아 있다. 『김지은입니다』를 읽는 내내 나는 김지은이라는 동료에게 우리가 따로 또 같이 공유한 시간을 되새기는 편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나는 1심 무죄 판결 직후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진행됐던 항의 시위에도 참여했고, 그 이후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이 주최한 긴급 집회에도 참여했다. ‘불륜설’을 주워듣고 와 아는 체하는 아버지와 셀 수 없이 싸웠으며, ‘지은이가 지은이에게’ 포스터를 사무공간에 붙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온라인으로 퍼뜨렸다. 2심 선고기일에는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식을 전해 들으며 유죄 판결에 환호했다. 3심 선고기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대법원 앞에서 기다리다가 법정 밖 대기실에서 선고 결과를 들었다. 상고 기각이라는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옆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다가 유죄 확정이라는 누군가의 설명을 듣고 서로 얼싸 끌어안았다. 당사자의 경험에 감히 비할 순 없겠지만 나에게도 가열하고 절실한 투쟁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순간순간을 함께했던 모든 사람에게 그랬을 것이다.

 

『김지은입니다』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김지은의 목소리를 직접 생생하게 들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나는 JTBC 「뉴스룸」 영상, 집회에서 활동가가 대독한 발언문, 온라인으로 배포된 피해자의 진술서 전문, 언론에 게시된 기고문 등을 통해 피해자의 경험을 간접적‧단편적으로 알 뿐이었다. 나 자신은 김지은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고 수사‧재판기록이나 유죄 판결에 영향을 준 증거자료를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김지은을 믿었다. 『김지은입니다』를 읽기 전부터 김지은을 이해하고 공감했다.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나서 내가 몰랐던 사실을 더 많이 알게 됐지만 놀랍지 않았다. 김지은의 경험은 사실상 그녀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각자의 특수성과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수많은 피해자가 노동자로서, 학생으로서, 여성으로서 생계와 일상을 지키기 위해 ‘위력’을 견뎌내며 살아온 경험이었다. 나의 경험이기도 했고, 내 친구의 경험이기도 했다.

 

특히 나에게는 김지은을 이해할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오래전에 아버지의 비서를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차기 대통령 후보처럼 대단한 권력자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도 은퇴 전까지 개인 비서를 두고 있었다. 어느 날 해외로 가족 여행을 가는데,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아무도 여권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비서가 시간 맞춰 여권을 가져다준 덕분에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비서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젊은 여성이었다. 반짝거리던 에나멜 하이힐이 유독 인상에 남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처럼 휴일에 갑자기 연락을 받고 달려오느라 모임이나 데이트를 취소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안희정이 부르면 가족 모임 중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했던 김지은처럼.

 

그 가족 여행을 위해 숙소와 식당과 렌터카를 예약해준 것도 아버지의 비서였다. 어머니가 ‘돈 없는데 비서가 비싼 데만 예약했다. 체면 차리느라 예약을 변경하지 않은 네 아버지한테 화가 난다’라고 투덜거려서 알게 됐다. 김지은이 수행비서로서 안희정 가족의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해야 했다는 내용이 나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알았든 몰랐든,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는 아버지의 권력을 당연하게 누려본 경험이 있으니까. 당시 나는 누군가의 임면권자를 아버지로 둔 나의 권력을 알았던가? 몰랐다. 여행하는 동안 ‘돈 없다, 아껴 써라’ 짜증 내는 아버지가 싫었고 여행지에서 물 한 모금도 마음 편히 마시지 못하는 것이 ‘우리 집이 부자는 아니’라는 증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을 배울 수 있음에 감사했다.

 

2020년 7월 13일,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위력에 의한 비서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에 이어 또다시 지자체장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된 것이다. 이번에는 피해자의 고소 직후 가해자가 실종됐다가 사망하여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기자회견을 주최한 피해자 지원 기관들(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의전화)은 고인의 장례를 치르고 발인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며 최대한의 예우를 지켰으나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너무 심각하고 짧은 시간에 빠르게 확산하고 있어 기자회견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성폭력을 고소함으로써) “고인을 죽였다”라는 비약과 비난, “전직 비서 명단을 뒤져서 피해자를 찾아내겠다”라는 신상털기와 위협, “피해자가 아니라 고소인이다”라는 성폭력 부정과 ‘꽃뱀’ 의심이 자칭 ‘진보’ 세력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언론은 오보와 억측을 무책임하게 쏟아냈다. 심지어는 피해자가 게시하지 않은 글이 피해자의 고소장 전문이라며 온라인상에 유포되기도 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을 관심 있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과정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참담했다. 우리의 지난 싸움은 무엇을 바꾸었나? 무엇을 바꾸지 못했나?

 

안희정 모친상 조문 논란을 통해 ‘장례의 정치’를 첨예하게 토론한 직후, 『김지은입니다』 책 인증 캠페인이 활발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연대자들은 여느 때보다 신속하고 예민하게 대응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구체적인 피해 사실과 피해자의 글이 공개되기 전부터 수많은 사람이 #피해자와_연대합니다 해시태그,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서울특별시 5일장 반대 국민청원, 피해자에게 보내는 연대의 메시지 등으로 피해자의 인권 보장과 위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해결을 촉구했다. 일부 국회의원은 피해자가 고인의 위력을 실감하고 심리적으로 고립될 것을 우려하며 조문을 삼가기도 했다. 고 박원순은 오랜 세월 반성폭력 운동에 기여하고 여성 인권을 강조해왔기에 배신감과 환멸감도 컸지만, 피해자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안희정도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라고 밝힌 당일에 성폭력 가해 사실이 폭로되지 않았던가.

 

『김지은입니다』에서 김지은은 “보통의 삶을 향한 소망의 첫걸음이 또 다른 연대를 위한 배움이었음에 감사했다”라고 썼는데, 나는 김지은이 용기 있게 미투한 그날부터 또 다른 연대를 위한 배움은 이미 시작됐던 게 아닌가 생각했다. 특정 사건을 다른 사건이 잘 해결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처럼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겠지만, 연대자들을 향한 편지글에 “성폭력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는 세상을 위해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문제이고, 가해자의 잘못임을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습니다”라고 썼던 김지은은 분명 위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해결에 마중물을 부었다. 지난 싸움은 ‘위력’을 설명할 언어를 만들었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분노와 문제의식을 대중과 공유했으며, 가해자의 잘못임을 증명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또 다른 피해자가 말할 용기를 냈을 때 연대자들은 다시 싸우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의 구조는 공고하고 성폭력 통념은 뿌리 깊다. 김지은이 미투한 이후 안희정의 옹호자들이 “왜 4번이나 성폭력을 당했느냐?”라고 질문했듯, 피해자 지원 기관들이 기자회견을 한 이후 고 박원순의 옹호자들은 “왜 4년이나 성폭력을 당했느냐?”라고 질문하고 있다. 김지은은 말한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은 “특별하지 않”고,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 수직 관계의 약자들이 느끼고 있는 일상적 위력”의 문제라고. “성폭력 신고는 쉽지 않”으며,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며 직장에 다니는 내가,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일자리를 잃을 수는 없었다”고. “생계를 내던져가면서까지 끝내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다시,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위력’에 맞서 싸울 때다.

 

  1. 나는 보통 글을 쓸 때 피해자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설령 피해자가 스스로 신상을 공개하고 미투했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끝도 없이 언급되고 기록되고 그것이 재생산되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 존재감과 영향력이 너무나 커서 피해자가 추상적인 존재나 허상이 아니라 ‘김지은’이라는 실제 사람이자 인격체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엄청난 2차 피해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제목을 『김지은입니다』라고 정한 이유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피해자의 이름을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쓰되, 경칭은 생략한다.

 

 

Written by 익명의 회원